꼬불꼬불한 길이 있습니다. 비좁은 길입니다.
골목길도 그렇고 고샅길도 그렇습니다.
달동네 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만 다니는 길입니다. 차는 못 들어옵니다.
이 꼬불꼬불하고 비좁은 고샅길이나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놉니다.
딱지치기도 하고 공기놀이도 하고 술래잡기나 숨바꼭질도 합니다.
마주 오는 사람들이 어깨를 툭 칩니다.
"밥 먹었는가?"
"아, 예. 잘 주무셨어요?"
낯익은 얼굴들입니다.
좁은 길은 안으로 열린 길입니다.
한 마을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살림 형편은 모두 고만고만합니다.
이 길은 너도나도 이웃집으로 열려 있습니다.
서로 돕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이 길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삽니다.
툭 트인 길이 있습니다. 곧게 뻗어 있는 넓은 길입니다.
빌딩과 빌딩을 나누고 한데 붙어 있던 논과 밭을 두 동강 내고,
덩달아 그 땅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의 가슴까지 갈라놓은 길입니다.
이 길은 사람이 걸어서 다닐 수 없는 길입니다.
아이들이 마음 놓고 놀 수도 없는 길입니다.
밖으로 열린 이 길은 '서울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고,
'서울'로 온갖 물건을 나르는 길입니다. 사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람도 물건이 되어, 사고팔 수 있는 일손으로 이 길을 따라 '서울'로 실려 갑니다.
우리 동네도 길 넓히고 새로 닦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길 넓히는 일은 '정부'에서 합니다. '나랏님'이 하는 일입니다.
'나랏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길을 넓히고 곧게 만드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랏님'은 어려운 사람들 살림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직접 논밭을 둘러보고, 마을 형편을 살피는 대신 지도를 펴놓고 직선을 긋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땅을 '수용'하면 됩니다.
마을은 두 동강 나고, 논밭은 갈라져 자투리 땅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던 길, 안으로 열린 길은 모두 막다른 골목이 되어 버립니다.
힘없는 사람들과 그 가운데서도 더 힘없는 아이들은 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 넋을 놓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우러져 살기 좋은 마을로 이름났던 곳입니다.
이제는 아닙니다.
관광지로 탈바꿈해서 때도 철도 없이 '서울 사람'들이 좋은 차 타고 씽씽 달려옵니다.
그 '자가용족'들한테는 직선으로 뻗은 넓은 길이 좋습니다.
빨리 와서 경치도 구경하고, '시골 인심'이 마련한 값싼 먹을거리들을
트렁크에 가득 싣고 '서울'로 가면 됩니다.
길 건너에 벼가 익어가는 우리 논이 있는데,
이랑과 고랑이 물결처럼 펼쳐진 우리 밭이 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길을 건널 수 없습니다.
밖으로 열린 길이 이것저것 다 앗아가는 바람에 안으로 열린 길도 하나둘 자취를 감춥니다.
시골에서나 '서울'에서나 힘없는 사람들은 살길도 없습니다.
-윤구병, <개똥이네집> 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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