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출판사 블로그

"노예가 된 개발자"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월간 <작은책> 2010년 7월호 일터 이야기
최종성/ IT산업노조 위원장


‘컴퓨터 프로그래머’.

대체로 영어로 된 직업은 전문가와 지식인 느낌, 그리고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 느낌을 준다. 밤 늦은 시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빌딩 사무실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 혼자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작업을 하는, 가끔 드라마에도 나오는 멋진 직업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를 ‘개발자’라고 부른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사람’이다. 그가운데는 누리집을 만드는 사람, 휴대 전화에 쓰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 은행 창구처럼 기업 내부에서 쓰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 지금 이 글을 쓰는 문서 편집기를 만드는 사람 등이 있다. 어쩌면 좋은 사무실에서 편하게 일하는 사람이 한둘쯤은 있겠지만, 80퍼센트 정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 시간에 시달리고 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용역 회사와 보통 6개월 정도 계약을 맺고, 원청 회사에 파견되어 프로그램 개발을 시작한다. 프로젝트는 단기간에 끝나기 때문에 개발을 할 장소도 임시로 마련할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창고에 들어가서 컴퓨터 전선을 직접 깔고, 사무실 칸막이도 직접 설치하고, 책상 옮겨 놓고, 우리가 일할 공간을 우리 스스로 만들기도 한다. 다행히 사무실이 있는 경우라도 옆 사람과 의자가 닿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프로그램 개발은 컴퓨터와 사람의 노동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므로, 개발자들이 더 오래 일을 할수록 개발 일정은 더욱 빨라진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개발 일정은 개발자들이 날마다 야근하는 것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따라서 야근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개발자들의 나이는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이 사이가 가장 많다. 40대면 거의 정년퇴직할 나이라고 보면 된다. 왜 이렇게 정년이 빠른 걸까? 관리자들이 개발자들에게 야근 수당 없는 강제 야근을 시켜야 하므로 나이가 어릴수록 다루기 편하기 때문이다. 관리자의 능력은 개발자들을 얼마나 늦은 시간까지 일을 시킬 수 있느냐에 달렸고, 그러기 위해서는 관리자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나이 어리고 체력 좋은 젊은이가 필요하다. 그래서 개발자는 보통 20~30대가 70퍼센트 이상이며, 그중에서도 남자들이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될 때에는 관리자의 지시로 근무 시간이 ‘평일 저녁 10시 퇴근, 토요일 출근’으로 바뀐다. 저녁 10시 이전에 퇴근할 때는 관리자에게 퇴근 사유를 보고해야 하며, 토요일에 못 나오는 경우에는 일요일에 출근해야 한다. 그러다가 더 바빠지면, 새벽에 퇴근하게 되고, 토요일, 일요일에도 당연히 출근하게 된다. 물론 야근 수당은 없고, 새벽에 퇴근할 때 교통비도 자기 돈으로 내야 한다. 심지어 저녁도 자기 돈으로 사 먹으며 일하는 개발자도 있다.

올해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주당 평균 근무 시간이 55.9시간으로 나왔다. 거기에 집에 가서 일한 시간이 주당 5.8시간으로, 일한 시간을 모두 더하면 한 주당 평균 60시간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평균이라는 것이다. 한 주당 80시간 이상 일하는 개발자는 15퍼센트나 된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루도 안 쉬고,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사람이 그 정도나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발자는 아프다. 야근으로 잠을 못 자고 쉴 시간이 없어 80퍼센트 이상이 만성 피로에 시달리며, 오랜 시간 의자에서 움직이지 않아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는 개발자가 80퍼센트 가까이 되며, 거북목 증후군이 73퍼센트, 심한 스트레스성 질환이 70퍼센트 정도로 나타났다. 개발자들이 젊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나도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목과 허리에 오는 통증을 견디고 있다.

몇 달 전 금융업 전산 자회사에서 근무하던 개발자 한 분이 월 500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으로 몸이 망가져 폐 일부를 절제하고, 회사에 산업 재해 신청을 한 적이 있었다. 회사에서는 그 직원이 컴퓨터 앞에서 놀았는지 일을 했는지 알 수가 없고, 전산상으로는 하루 두 시간 이상의 야근이 신청되지 않으므로, 산업 재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사람이 월 500시간의 일을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함께 일한 사람이 증언을 했지만, 실제 증거를 대라고 할 뿐,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나도 새벽 4시에 퇴근해서 아침 9시에 출근하는 짓을 반 년이 넘도록 했다. 그래서, 월 500시간이라는 노동 시간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안다.

이렇게 돈도 안 받고 열심히 야근하다가 몸이 도저히 견디지 못해서 병원을 드나들게 되고, 결국은 관리자에게 그만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프로젝트 중간에 일을 그만두는 데 대해 회사가 입은 손해 배상 청구를 하겠다고 개발자를 협박하며 프로젝트 끝날 때까지 계속 일하라고 요구한다. 발목에 보이지 않는 사슬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도 회사를 그만두면 그 손해 배상 비용으로 마지막 달 월급을 사장이 떼먹는다. 개발자들은 고스란히 월급을 떼이거나 몇 달에 걸쳐 일부만 겨우 받아 내고 이내 포기해 버린다. 프리랜서라는 이름 때문에 노동자로 인정 못 받는 경우도 많다.

처음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는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한때, 아이들한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프로그래머’라고 대답하던 시절도 있었다. IMF 이후 한국을 다시 일으켰고, IT 혁명이라고까지 불리는 산업 성장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개발자’라는 이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IT 혁명은 개발자의 삶을 모조리 빼앗아 성장의 밑거름으로 쓰고 껍데기는 가차없이 버렸다.

올해는 노동절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120년 전과 오늘이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원한다. 하루 여덟 시간만 일하고 싶다. 아마 그것은 우리 개발자를 포함한 이 나라 모든 노동자들의 소망일 것이고,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도에 기대기보다 노동자 스스로가 맞서 싸워 나가야 할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월간 <작은책> 2010년 7월호 일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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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보리 201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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