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출판사 블로그

2.jpg


다 늦은 밤에 권정생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아직 살아 계실 적 이야기지요.

"철수라? 닭튀김 보낸 거 잘 먹었다마는."
"그거 제가 보낸 걸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 이래 있어도 내가 다 알아. 닭튀김 들고 온 사람한테 확인했는데 철수네가 배달시켰다카더라. .'키 작고 얼굴 못생긴 남자하고 얼굴 예쁜 각시가 같이 왔디껴?' 그래 물어 봤는데 맞다 하더라. 그래 철수네가 보낸 거 알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지나가는 길에 선생님 댁으로 들어가 뵈려다가 몸이 아프면 사람 보는 것도 힘들다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군입질하실 거나 보내드리고 못 뵙는 아쉬움 달래기로 했던 건데 그렇게 들켜버렸습니다.

- 피자가 뭔지 아세요?
- 날 빌뱅이 촌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거래? 철수도 촌에 살잖나!
- 피자를 먹어도 모셨어요?
- 아니래. 못 먹어 봤어. 안동 시내 가서 찾으마 파는 데는 있을 거래.
- 스파게티는요?
- 이름은 알지. 이태리사람들 국수잖아? 티비에도 나오더라마는. 철수는 먹어 봤나?
- 그럼요! 아이들으 좋아해요.
- 그래? 맛있드나?
- 우리 어른들 입맛에는 안 맞아요.
- 그래? 그럴 거래.
- 한번 드셔 보실래요?
- 됐다. 사람이 어예 궁금한 거 다 먹고 사노?

그러셨습니다.

- 금강산 한번 가보실래요?
- 글쎄... 철수는 가봤지?
- 예.
- 금강산이 좋다더라마는 나는 힘들어 못 갈 거래.
- 산에는 올라가지 말고, 해금강 돌아보고 금강산 들머리에서 가볍게 둘러만 보셔도 되는데. 평양냉면도 심심한 게 맛있어요. 저는 온반이 특히 맛있던데.
- 온반이 뭐로?
- 닭고기 맑은 장국에 밥 말아먹는 음식인데 공기밥 엎어놓은 위에다 녹두 지짐을 한 장 얹어줘요. 담백해요. 금강산 가시면 다 드실 수 있어요. 오가면서 북쪽 사람들도 볼 수 있구요.
- 기운만 되마 금강산은 한번 가보겠다마는...
- 한 번 다녀오세요. 현주 형님네하고 같이 가면 좋은데. 저희가 모시고 갈게요.


그러기도 하셨습니다.

피자, 스파게티도 못 먹어 보고, 금강산 구경도 못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늘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싶지만 기운이 없어서, 그러고 싶지만 호사가 마음 내키지 않아서, 결국 드실 것, 즐기실 것, 누리실 것, 어느 하나 해보지 못하셨지요.

어느 해던가, 우편으로 뜻밖의 선물이 왔습니다. '부부 잔'이라고 하지요? 똑같이 생긴 뚜껑 있는 잔 한 쌍이었습니다.
사서 보내셨을 리는 없고, 누군가 선물로 드린 물건을 우리에게 보내셨을 거라고 버릇없는 추측을 했습니다. 포장을 뜯었더니 속에 낯익은 글씨로 큼직하게 쓴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 이 잔으로 차를 마시면 잔소리를 안 하게 된다! - 권정생

이게 누구 들으라고 하신 말씀일까를 두고 우리 부부가 설왕설래했습니다. 글귀는 잘라서 벽에 붙여두었습니다. 잔은 저희가 즐겨 썼지요. 지금도 어디 있을 겁니다. 드나드는 사람들마다 그 잔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주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말이지요.

상품화해도 좋겠다는 건 제 생각이었습니다.

- 거짓말 안 하는 잔
- 잔소리 안 하는 잔
- 성내지 않게 하는 잔

그런 물건을 만들어서 팔아도 되겠다고 전해드렸더니 말없이 빙긋이 웃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주 유쾌한 농담을 즐기셨지요.
몸이 많이 불편하지 않을 때면 늘 그러셨지요.
동네 할머니들이 당신하고 살자고 하신다는 자랑도 자주 하셨는걸요.
그것도 결국 못 해 보신 일이 되었네요.



보리

보리 2010-06-01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수익이 나면 다시 책과 교육에 되돌리자. 보리출판사의 출판 정신입니다.

댓글을 남겨주세요

※ 로그인 후 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