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출판사 블로그

오랜만에 한강으로 나들이 갔습니다. 서울에서는 새벽에 일어나면 달리 할 일이 없으니 걷고라도 싶은데, 눈이 많이 내려 곳곳이 얼어서 발길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나이 드신 아버지가 얼음판에 미끄러져 넘어지신 뒤로 엉치뼈가 부서져 오랫동안 제대로 걷지 못하고 누워만 계시다 돌아가신 기억이 제 머리나 가슴 어디에 가시처럼 박혀 있지 싶습니다. 한강에는 살얼음이 깔려 있었습니다. 어젯밤 꽤 추웠나 봅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지난 토요일에 변산을 찾아왔던 손님들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주에 변산공동체에서 손님 세 분을 뵈었습니다. 다섯 살 난 아이 한 분과 여자 어른 두 분. 그 가운데 두 분은 아주 남다른 분들이었습니다. 쉰 넘은 나이보다 겉늙어 보이는 어머니와 예쁜 딸. (길 나서면 사람들이 "아유, 손녀딸 참 앙증스럽네요." 하고 인사하는데 아이가 "엄마, 엄마". 해서 난처했던 적도 더러 있었답니다.) 어머니 세레명은 막달레나랍니다. 예수가 부활해서 그 앞에 맨 처음 나타났다는 여자 이름이랍니다. 아마 하도 가난해서 몸밖에 팔 게 없었던 여자였지요?

제가 오늘 절두산 성당에서 끌어안은 치마저고리 차림의 마리아처럼, 성령이 잉태하여 낳은 아이를 제 손으로 받아 제 딸로 삼은 이 나이 든 '포주'(용서하시기를! 열다섯 해 가까이 몸 파는 여자들과 함께 지내는 사이에, 명문대를 나오고 줄곧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다가 영국 유학도 다녀오고, 남편도 버젓하고, 아이도 군대에 보낸 이 아주머니를 젊은 막달라 마리아들은 그냥 조금 마음 여린 포주로 여긴답니다.)는 돌보던 여자들에 곁들여 그이들이 낳은 아버지 없는 아이들까지 하나하나 거두어 기르고 있답니다. 오 년 만에 아들딸이 올망졸망 열 명으로 늘고, 배 속에서 두 아이가 태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한겨울인데 덧신도 신지 않고 맨발인 이 어머니는 대도시에서 '거리의 여자'들과 그이들이 낳은 아이들을 이웃으로 두고 싶어 하지 않는 '바리새 여자'들 등쌀에 못 이겨 열한 번이나 쫓기다시피 이사를 다녔다더군요.

제게는 마더 테레사로도 보이는 이 포주 막달레나가 변산을 찾은 까닭은, 이제 부쩍부쩍 자라는 이 아이들을 구김살 없이 뛰놀게 할 따뜻하고 안전한 보금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눈길과 인정머리 없는 손가락질 받지 않고, 만나는 어른마다 아버지, 어머니로 불러도 스스럼 없는 곳. 그런 곳을 찾아 하룻밤에도 마음으로 수천, 수만 리 길을 헤매는 이 늙은 어미의 아픔이 제게도, 우리 공동체 식구들에게도 얼얼하게 바늘 끝처럼 부딪쳐 왔습니다.

"그래요, 같이 삽시다." "수천 명이 몰려올지도 모르는데요?" "길이 있겠지요. 여기서 어른들은 아웅다웅, 티격대격하면서도 그사이 아이들이 깔깔대고 앙앙대는 모습으로 마음껏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곁을 주고, 그러면 이분들에게 문을 여는 삶터가 늘겠지요."

이래저래 올해부터는 변산공동체에 식구들이 부쩍부쩍 늘어날 것 같습니다.

윤구병


보리에서 펴내는 월간 부모님 책 <개똥이네 집> 3월호에 실린 '고무신 할배의 넋두리'



보리

보리 2010-02-25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수익이 나면 다시 책과 교육에 되돌리자. 보리출판사의 출판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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