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두의 파종 시기에 관해 문의차 방문했는데요."
열여덟 해 전 일이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웃 할머니한테 물은 말이다.
"머시라고라? 대두가 뭐라요?"
"예, 콩이요, 콩."
"파종 시기는 또 뭐시다요?"
"아, 심는 때요, 심는 때."
"문의차는 또 무슨 차당가요?"
"물어본다고요."
"아, 그란게 콩 언제 심느냐고 물을라고 왔구만."
"예, 예. 바로 알아들으셨네요."
"그런디, 콩 언제 심느냐고 물으면 될 걸 뭣헐라고 그런 어려운 말 쓰요?"
된통 혼났다. 한 번만 혼난 게 아니다. 쉬운 말 두고 어려운 말 골라 쓴다고, 촌놈들 겁주려고 그러느냐고 열다섯 해 넘게 핀잔을 받고 있다.
다 대학 선생 떄 익힌 버릇 때문이다. 아직도 그 때를 다 벗어버리지 못했다.
'교육의 궁극 목표'가 뭐냐? 이렇게 물어서는 안 된다.
왜 배우고, 왜 가르쳐야 해? 이렇게 물어야 하는데, '교육의 궁극 목표'가 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칠판에 이렇게 적고 싶다.
1. <개체 유지 능력의 배양>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나 알아듣는 말로 풀어 버리면 힘이 안 실리는 것 같다.
가르치고 배우는 까닭이 하나 더 있다.
2. <사회적 협동 능력의 함양>
이걸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라고 하면 훨씬 더 알아듣기 쉬운데, 스무 해 넘게 배우고 익힌 어려운 한자말을 입 밖에 내야 유식하고 교양 있게 보이리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철학을 다시 쓴다>라는 책을 낸 뒤로 가끔 '인문학 강좌'에 불려 나간다.
그 책으로 공부를 하는 모임이 있다는 말도 들린다.
책의 앞뒤는 술술 읽히는데, 가운데 토박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더라는 푸념도 들었다.
그 알아듣기 힘들다는 대목은 초등학교에서 국어 공부를 중간쯤만 했어도 알아들을 쉬운 글로 쓴 것이다.
거기에서 붙들고 늘어진 말은 고작해야 다섯 낱말이다.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이것, 저것 할 때의) 것'
이 다섯 마디 말을 빼면 우리는 5분도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 말을 두고 미주알고주알 주워섬기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읽고 난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대학 선생처럼 어렵고 낯선 외국 말로 도배하다시피 해야 그럴듯하게 여겨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세상에서
'대두의 파종 시기'에 대한 질의응답'을 그만두고,
"콩 언제 심어요?" "응, 우리 마을에서는 감꽃 필 때 검정콩 심고, 감꽃 질 떄 메주콩 심어."
이처럼 쉬운 말로 '의사소통' 하자고 하면 넋 나간 소린가?
-윤구병, <개똥이네 집> 2013년 11월호
댓글을 남겨주세요
※ 로그인 후 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