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내렸는지, 목욕탕에서 나오니 공기가 한결 맑았다. 소나기는 길 곳곳에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어른도 한 번에 뛰어 넘기 힘든 물웅덩이는 집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여섯 살 아이가 물웅덩이를 넘으려다 말고 갑자기 “아빠, 이거 최루액이야.”하고 소리쳤다. 자세히 보니 물웅덩이에 노란 꽃가루가 겹겹이 띠를 두르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아이한테는 최루액에 대한 공포가 손오공의 금고주처럼 머리를 옥죄고 있었다. 아이 머릿속에서 노란색 꽃가루가 최루액과 어지럽게 뒤섞이던 날부터, 아이 행동을 유심히 살필 수밖에 없었다. 강아지똥 원장인 모모가 ‘아이 눈높이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했는데, 그 얘기도 그제야 피부로 느껴졌다. 경찰 흉내를 곧잘 내던 아이를 보며 눈썰미 있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저 작은 세계에서 폭력의 기억과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그동안 몰랐다니 가슴이 아렸다. 폭력은 냄새와 색깔로 포장된 채 아이의 세계에 이미 침투해있었다.
나는 2009년 쌍용차 파업 당시 대변인 역할을 했다. 하는 일이 이렇다 보니 모든 정보를 가장 빨리 알았다.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간다는 소식도 기자를 통해 가장 먼저 알았고, 경찰 병력의 움직임과 정부 대응도 가장 먼저 알게 됐다. 정보를 빨리 안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정보가 대체로 근심거리다보니 때론 두려움이 밀려왔다.
용산 남일당 망루 안 철거민들을 살인진압했던 경찰특공대 컨테이너가 배치된 사진을 보고선 오금이 저렸다. 글라인더로 금방 간 자국이 선명한 차가운 쇠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었고 순간 머릿속은 아득해졌다. ‘저것과 싸워야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자신감이 뚝 떨어졌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언론에 의연하게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채 담담하게 인터뷰를 했지만 손에 배는 땀은 어쩔 수 없었다.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국가가 하는 대답이 경찰특공대의 진압 컨테이너박스란 사실 앞에 무릎이 꺾였지만 오히려 분노가 곱절이 됐다. ‘해볼 테면 해봐라.’ 점점 오기가 생겼다. 공장을 지키겠다는 우리한테 너희들이 저지르고 있는 작전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밤이면 노동자들은 거의 손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뉴스에서 쌍용차 투쟁을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소식에 절망과 희망이 엇갈릴수록, 고향 집 늙은 소처럼 씀뻑이는 순한 눈을 가진 노동자들은 물끄러미 손전화 화면을 쳐다보았다.
폭도와 강성노조로 시뻘겋게 도배질하는 언론 보도를 보며 ‘정말 우리가 그럴까’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때마침 숨 넘어갈 듯한 젖먹이 아이의 우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끝없이 들려 온다. 이제 그만 끝내고 공장 밖으로 나오란 무언의 압력이다. 이 싸움이 가정을 지키기 위한 것임을 아무리 설명해도 그만두라는 만류가 전류처럼 온몸을 감는다. 시골 노인네도 역정을 낸다. “왜 그런 회사에 들어가 그 고생하고 있냐, 얼른 나와 다른 직장 찾아 봐.” 라는 얘기를 들을 땐, 의지할 곳 없는 공장 옥상에서 추락하는 것처럼 아득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는 말기 환자 암 덩이같은 억울함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투자하지 않고 기술만 빼간 자본과 경영진에 대해서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어도 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는 것도 아니란 얘기는 어느새 혼잣말처럼 공장 안을 맴돈다.
경찰 헬기는 들이 붓는 장맛비처럼 최루액을 끝없이 퍼부었다. 최루액을 막겠다고 들었던 우산은 우산대가 부러지고 앙상한 살만 두어 개 남아, 그 물건이 우산이었는지 겨우 알 수 있었다. 피부가 벗겨지고 다리는 부러졌다. 팔은 빠졌고 머리는 깨졌다. 피가 얼굴을 타고 발목까지 흘렀지만 공장 정문에선 경찰이 의사와 간호사를 막아 섰다. 눈물이 말라 버려 울 수도 없었다. 어린 시절 처음 담배를 피웠을 때 느꼈던 몽롱함과 아득함처럼 멍한 기운이 몇 날 며칠 동안 계속됐다.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한테 의지한 채 버틸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간이 아스라이 지나간다. 아파트 평수 조금 넓혀 시골에 계신 부모님 모셔야겠다는 일념으로 졸린 눈 비비며 야근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나이 어린 관리자들한테 더러운 소리 들어가면서도 아들 녀석 대학 등록금 생각에 꾹 참았던 기억이 눈물 따라 흘렀다. 관리자들에게 찍힐까 두려워 집회 한 번 나가지 않았던 그동안의 행동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번 추석에는 20년 만근 기념으로 동남아 여행 시켜드리겠다고 부모님에게 한 약속이 차츰 거짓말이 되는 현실이 나 때문인 것 같아 머리를 쥐어뜯는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욕할 것인가. 오로지 이 더러운 놈들한테 이기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만이 굳어진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고립된 공장에서 싸우지 않았다. 손전화와 뉴스와 신문으로, 모든 방향에서 공격을 받은 허허벌판 위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한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을 다짐하고 후회하고 회의하고 의심했다. 우리가 지금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를.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를 빠지듯, 흔들리는 사람부터 스르륵 공장을 빠져나갔다. 돌아서 나가는 동료의 등을 볼 때마다 맥이 풀렸다. 다시 기운을 다잡은 건 공장을 벗어나선 살아갈 방법을 우리는 알지도, 듣지도, 경험해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회안전망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회사안전망밖에 없는 노동자들한테 아무 대책 없이 공장에서 나가라니.
우리가 공장에서 왜 쫓겨나야 하는지를 누구 하나 알아듣게 설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설명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리해고가 구조조정의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마당에. 2011년에만 정리해고자가 10만 3천명에 이를 정도로 해고가 일상인 시대에 무슨 설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거짓 숫자로 노동자를 속이고, 불투명한 자금 흐름으로 노동자 눈을 가리는 일이 예삿일로 이뤄지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믿을 수 있었겠는가.
여섯 살 아이는 이제 일곱 살이 됐다. 일 년이 넘게 놀이치료를 받으면서 심리적으로 안정됐고 대인관계도 좋아졌다. 내 아이가 아닌 다른 동료들 아이들은 어떤 상태일까. 복직 투쟁이 지속되면 될수록 지쳐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실금가듯 가정이 갈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고자가 공장으로 복귀하는 것은 명분이 아니라 이처럼 조각난 삶의 골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억울함뿐만 아니라 빗살무늬처럼 갈라진 가정파탄도 공장에 돌아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치유되고 복구될 수 있다고 믿는다.
노동자한테 평화란 노동에서 강제로 배제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 것이다. 해고된 노동자는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자다. 현재는 쌍용자동차지부 기획실장 겸 쌍용차심리치유센터 ‘와락’ 기획팀장을 맡고 있다. 해고가 아니라면 몰랐을 새로운 세상을 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운명이 아닌 선택의 힘을 믿고 살아가고 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곧 현실이 될 거라는 꿈을 가지고 산다.
<개똥이 집> 83호 '평화가 뭐예요'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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