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출판사 블로그

우리 아이들은 인간의 시간 속에서 사람의 자식으로 자라기에 앞서 생명의 시간 속에서 자라야 할 자연의 자식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아직은 남자와 여자로 갈라서지 않은 아이들, 그래서 아직은 어떤 성차별도 받지 않는 아이들, 일과 놀이가 따로 구별되지 않는 나이의 아이들, 그래서 손과 발을 열심히 놀리고, 온몸을 자유롭게 놀리는 속에서 앞으로 자라 부지런한 일꾼이 될 아이들, 아직은 머리가 굳지 않고 아직은 가슴이 따뜻해서 우리 입에서 저절로 웃음이 번지게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행복하고 건강한 어린 시절을 보내도록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아이들이 자라서 이루는 세계가 '있을 것은 다 있고, 없을 것은 하나도 없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세상이 되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줄 수 있을까를 함께 머리 맞대고 의논하고, 거기에서 얻어낸 집단지혜의 성과를 실천에 옮기려는 뜻에서 한데 모였습니다.

리가 돌보고자 하는 아이들, 우리가 돌보아야 하고, 돌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은 사실은 원초적 생명의 시간에 가장 가까이 있는 아이들, 아직 상처받지 않고 온전한 상태에 가까운 우리 미래의 생명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인간의 시간 속에서 사람의 자식으로 자라기에 앞서 생명의 시간 속에서 자라야 할 자연의 자식들입니다. '생명의 시간'이니, '인간의 시간'이니, '자연의 시간'이니 하는 말이 느닷없게 들릴 분이 있을지 몰라서 이제부터 간단하게 왜 이런 말을 하는 지부터 밝힐까 합니다. 다 아시다시피 사람을 뺀 다른 생명체들은 태어난 뒤로 여러 해에 걸쳐서 따로 무엇인가를 배워 익히지 않더라도 거의 모두 제 앞가림을 합니다. 거미와 벌은 부모나 어른들에게서 따로 집 짓는 기술을 배우지 않는데도 뛰어난 건축 기술을 타고납니다. 병아리는 따로 엄마나 아빠 닭이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가려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 스스로 단박에 가려냅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자연계 전체를 아우르는 생명의 시간, 자연의 시간에서 개별 생명체의 시간이 따로 '교육받아야 할 시간'으로 몫 지어지지 않아도 됩니다. 조상들의 삶의 시간은 몸에 아로새겨진 기억으로, 유전정보의 형태로, 본능의 형태로 후손들에게 몸에서 몸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습니다. 따로 교육받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람 몸에서 태어난 새 생명체는 본능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 '왜' 사람이 타고난 유전정보에 기대서 살아남을 수 없는 생명체로 바뀌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생존여건이 바뀌어 살아남기 힘든 상황을 맞을 때 생명체들이 세우는 생존 전략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쥐들을 몰아넣어 개별 생존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쥐들의 불임률이 눈에 띄게 높아진다거나, 유조선에서 기름이 흘러나와 개펄을 덮을 때 암컷이었던 어패류가 떼거리로 수컷으로 성전환을 한다거나 하는 것도 그런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해서 환경이 바뀌어 그 환경에 다시 적응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때 생명체들은 개별로나 집단으로 생체 구조를 바꾸어 새 상황에 대비합니다. 그러나 환경이 너무 빨리 바뀌어 다시 적응 할 시간이 없을 때 개체나 종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맨 처음 이 지구 위에 생명체가 나타난 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체와 종이 누려온 생명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 떼어놓을 수 없게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흘러왔습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장애를 극복하려고 생명의 기능이 끊임없이 분화하고 재조직되어 다양한 구조를 지닌 생명체들이 시간 속에서 명멸해왔습니다. 그런 뜻에서 '진화'는 삶의 기능이 장애물을 만나 나뉘면서 저마다 다른 기억을 지닌 그 기능들이 저마나 다른 생체구조를 지니고 다양성을 키우면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 곧 역동적인 생명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봅니다.

류가 이 지구 위에 나타나면서, 그리고 생체로 구조화된 신체적 기억만으로는, 그러니까 본능으로 불리는 유전정보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생존의 한계상황에 맞닥뜨리면서, '생명의 시간'은 인간을 기준 삼아 볼 때, 크게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으로 나누어집니다. 아무 의식 없이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살아남을 길이 막힌 생명체인 인류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억 밖에 따로 삶에 필요한 정보를 후천적으로 머리 속에 새기고 스스로 그 후천적인 기억을 이용하여 살길을 찾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그 정보를 가르치고 익히게 해서 살아남게 만드는 틈을 내는 것이 바로 '인간의 시간'이고, 이 '인간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때에 따라 '교육'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에 따라 '문화'나 '문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전적인 예를 상기시켜 드리자면, 집을 지을 때 벌이나 거미는 따로 머리 속에 설계도를 그리지 않지만 사람은 머리 속에 설계도를 그리지 않고는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미나 벌은 집 짓는 기술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지만 사람은 후천적으로 그 기술을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머리 속에 설계도를 그릴 수 없습니다.

람은 '자연의 시간' 밖에 따로 틈을 내어 교육받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는 생명체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시간'은 인류가 변화된 환경에서 이 지구 위에 뿌리내리고 살기 위해 마련한 어쩔 수 없는 괴리이자 간극이고, 사람의 삶을 다른 생명체들의 삶과 구별짓는 저주의 시간이자 축복의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유태교 전통에서 인류의 조상으로 알려진 신화적인 인물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짧게 하지요. 기독교 경전 가운데 첫머리를 장식하는 에덴의 신화는 우리에게 자연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이 어떻게 갈라져 나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제 섯부른 해석이기는 합니다만 하느님은 자기 안에 간직되어 있던 생명의 기능을 시간 속에서 구조화하고 응결시켜서 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빚어냅니다. 이레에 걸친 이 '삶의 드러남', 다시 말해서 생명의 외화작용 가운데 따로 하루 품을 들여 빚어낸 것이 사람인데, 창세기에 따르면 사람은 생명 그 자체인 하느님의 형상을 본떠서 빚어낸 가장 온전한 생명체이자 에덴이라는 낙원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축복 받은 존재입니다.

이제부터 하느님의 축복, 다시 말해서 삶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 어디 한번 살펴봅시다.

먼저 덴이라는 낙원을 한번 둘러보지요. 낙원 한복판에는 생명의 나무가 서 있습니다. 낙원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이 나무의 기운을 받아 늙거나 병들거나 죽는 일이 없이 늘 푸르게 살아갑니다. 여기에서 시간은 삶으로 충만되어 있는 생명의 시간 바로 그 자체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자기들을 위해서 마련된 이 특별한 곳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면 원초적 인간 아담은 어떤 사람일까요? 먼저 아담은 철없는 사람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에덴에 철이 없으니까요. 자연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사계절의 구별이 있거나 24절기로 나뉘는 철의 구분이 있어야 한철 한철 접어들고 나면서 쌓이는 경험에 따라 내면화되는 철, 다시 말해서 철들고, 철나는 과정에 따라 사람에게도 철이 생기기 마련인데, 자연에 철이 없고, 주위 환경이 늘 푸른 생명나무의 영향으로 꽃이 피고 잎이 지는 철이 따로 없으니, 어느 겨를에 아담이라는 사람이 철이 들고, 철이 나겠어요. 다음으로, 아담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아담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아담에게는 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각도 없으니까요. 아담의 의식은 백지 상태입니다. 그야말로 백치입니다. 손만 뻗으면 먹을 것이 있고, 눕는 곳이 곧 푹신한 잠자리인데, 그리고 벌거벗고 살아도 몸에 땀이 흐르거나 소름 돋을 일이 없고, 살갗을 짓무르게 하는 물 것이나 해충이 없는데 머리 쓸 일이 어디 있겠어요? 성적 욕망도 물론 없습니다. 성욕은 개체로서 영원히 살 길이 막힌 생명체들이 본디 암수 한몸 이었던 제 몸을 암수 두 몸으로 나누고 이 나뉜 두 몸을 짝짓기를 통해서 다시 한몸으로 섞어 자기복제를 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 생존을 유지하려는 전략이 본능으로 전화한 것인데, 하느님의 형상을 본떠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체로 점지된 아담과 이브에게 무슨 성적인 욕망이 있겠습니까? 빗대서 말하자면 아담은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나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아담이 이 없었고 부끄러움을 몰랐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신화라는 옷을 걸치기는 했으나 그 겉옷이 몸매를 다 감추지는 못하니까요. 인류가 이 지구 위에 처음 나타났을 때 사람이 자기만의 시간을 따로 갖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고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온전하게 자연의 시간 속에 합일되어 살았고,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이 신화는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사람은 따로 머리 쓰는 일 없이, 다시 말해서 후천적인 기억에 의지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유전정보의 형태로 전해지는 신체적 기억에 의존해서만, 본능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떤 계기로 아담은 지각이 생기고 부끄러움을 배웁니다. 창세기에서는 뱀이 아담의 놀이동무인 이브를 꼬여 생명나무에 매달려 있는 지혜의 열매를 따먹게 하고, 아담에게도 맛보게 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엄청나게 압축된 이 상징적인 표현을 길게 분석할 겨를이 없지만 이 이야기에 담긴 합리적인 핵심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아담을 철들게 하고, 그 때까지는 몸 안에 있는 노폐물을 씻어내는 물이 나오는 곳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생식의 원천,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소중히 간직해야 하고 감추어두어야 할 생명의 원천, 곧 살아있는 '불'로 자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열쇠는 생명나무에 달린 열매에 있습니다. 생명나무가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 나무에 열매가 열린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열매는 그 열매가 달린 나무의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생명체만이 후손을 남깁니다. 생명나무에 열매가 열린 순간부터 에덴동산은 영원한 낙원에서, 벌거벗고 철없이 뛰어 놀던 부끄러움을 모르던 인류의 유년시절에서 갑자기 죽음의 위험이 닥쳐오는 폭풍의 언덕으로 바뀝니다.

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처 신체 구조를 바꾸어낼 틈을 주지 않고 급격한 기상변화가 일어났다든지, 여느 때보다 더 격렬한 지각 변동이 있었다든지, 갑자기 지구의 축이 기울었다든지, 인류가 자리잡고 살던 곳에 천체와 연관된 큰 재난이 발생했다든지 … 해서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먹이가 풍부하고 따로 옷을 지어 몸을 감싸지 않아도, 애써 잠자리를 마련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적도지역에서 쫓겨나 네 철의 구분이 뚜렷하고 24절기에 따라 기온도 바뀌고 먹이도 많이 나는 철과 아예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철로 갈라지는 온대지방으로 옮아살아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철이 들고, 살아남으려면 땀흘려 일해야 하고, 죽음을 개체 형태로는 극복할 수 없어서 결국 짝짓기를 통해서 종을 보존하는 형태로 생존 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었고 … 어쩌고 저쩌고 하는 해석들이지요.

여기에서 잠깐 말머리를 돌려 사람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어쩌다 사람만 자식 교육에 신경을 쓰는 유일한 생명체인 듯한 인상을 심어줄 걱정이 있으니까요. '숲사람'은 유인원인 오랑우탕을 가리키는 원주민 말이라고 합니다. 이 오랑우탕과 스무해가 넘게 살면서 생태연구를 한 비루테 갈디카스라는 학자 말에 따르면 오랑우탕 암컷은 평생에 걸쳐 아이를 둘이나 셋밖에 낳지 않는데, 그 까닭은 새끼에게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러주는 데에 7년이 넘게 걸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랑우탕 수컷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어서 발정기에 들어선 암컷에게 힘 센 수컷이 아이를 갖게 만든 다음에는 새끼고 어미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먼 숲 속으로 달아나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오랑우탕 수컷의 생태학적인 특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답니다). 아이 양육은 여자 숲사람 몫으로 돌아가는데, 이 여자 숲사람은 다만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곱해가 넘는 긴 세월 동안 아이 곁을 지키면서 그 사이에 나뭇잎, 풀뿌리, 열매에서부터 벌레나 파충류에 이르기까지 400여가지가 넘는 먹을 것을 구별하고 얻는 방법에서부터 나무 위에 집을 짓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뛰는 기술까지, 아이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철저한 교육을 시킨다고 합니다. 평생에 아이를 두 셋밖에 가지지 못하는 까닭도 이 자녀교육에 필요한 기간이 그만큼 길기 때문 이라는군요. 참고삼아 오랑우탕의 지능을 말씀드리면 얼추 두 살배기 아이의 지능에 맞먹는다고 합니다.

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나는 순간 이 두 사람이 비록 지혜의 열매를 먹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지혜라는 게 오죽했겠습니까? 아마 오랑우탕만도 못했겠지요. 지혜란 별 게 아닙니다. 극단으로 말하면 지혜는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낙원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었던 철부지들은 생명나무에 달려 있던 열매에 죽음이라는 독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우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맨 처음 깨우침입니다. 지혜의 출발입니다. 에덴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 죽음의 위협으로 가득 찬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뱀이 나타났다는 기록에 비추어 어쩌면 빙하기 때에는 살기 좋은 상하의 땅이었던 적도지역이 간빙기가 되고 얼음이 녹고 사방에 물이 차 오르고 기후가 바뀌어 열대우림 지역으로 바뀌면서 덩굴식물과 온갖 파충류나 생명에 위협을 주는 생명체들로 들끓는 곳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든 개별생명체의 삶은 한시적입니다. 몇 시간만에 죽는 것도 있고 천년이 넘게 살아남는 것도 있지만 언젠가는 목숨이 끊어집니다. 이것을 모르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하잘 것 없는 미생물에서부터 고등생물에 이르기까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머리로 아느냐, 몸으로 아느냐, 의식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생명 그 자체, 절대화한 삶에는 죽음이 그림자로 따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생명' 그 자체이므로 죽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몸'이 아니고 '말씀'입니다.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파토스'(pathos)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이를테면 빛이나 사랑이)거기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로고스'(logos)입니다. 에덴 동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아담과 이브는 빛 속에, 하느님의 사랑 속에, 현실 공간이 아닌 사이버 공간 속에 머물었습니다. 이 사이버 공간은 절대공간이지 시공연속체는 아닙니다. 현실 공간만이 시공연속체입니다. 따라서 에덴에는, 낙원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기억도 없습니다. 유전정보도 없고 의식도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철이 없었음은, 삶의 지혜가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지혜는 죽음의 선물입니다. 죽음의 자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온생명'(이 개념은 장회익 교수가 개별생명체나 종을 다 포괄하는 범 우주적 생명이라는 뜻으로 써온 것입니다)인 하느님에서 분리된 개별 생명체로서, 그것도 남성과 여성으로 양성이 구분된 고등생명체로서 삶과 죽음이 씨줄과 날줄을 이루는 시공연속체인 현실공간 지구에 발을 디디는 순간 처음으로 이 두 사람은 성에 눈이 뜹니다. 소꼽동무에서 짝짓기 대상으로 상대방을 의식합니다. 아이가 생겨납니다. 아이는 거듭나는 삶의 표현입니다. 죽음으로 귀결되는 시간의 압력을 이겨내는 새로운 삶이고 죽음의 극복이자 극복된 죽음입니다. 죽음에 맞선 삶의 선물(이런 뜻에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겁니다)이지요. 삶에는 기억도 없고, 지혜가 깃들지도 않는다는 것은 이미 밝혔습니다. 따라서 갓 태어난 새 생명인 아이가 머리에 아무런 기억도 없는 무지몽매한 철부지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지, 삶을 연장시키고 영속화하려는 의지(이런 뜻에서 이것은 마지막으로 '온생명'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이고 모든 생명체가 지향하는 '큰 나'(brahman), '한 나', 하나, 일자(一者)에 합일하려는 의지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가 양성으로 갈라진 반쪽 둘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당연한 표현입니다. 모든 '하나됨'에는 삶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고, 이 삶의 의지는 차츰차츰 더 큰 하나, 더 큰 하나로 확대되어 마침내는 하나님이나 '온생명'이나 '한 나'(큰 나)를 지향하는데, 우리는 때에 따라 이것을 삶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니까요. 하나로 상징되는 기독교 유일신을 규정하면서 '나는 생명이요 빛이니'라고 하거나 '사랑이신 우리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어쨌거나 삶을 찾아 사랑으로 맺어진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는 새 생명이자 사랑이요, 살아있는 하느님입니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지각없고 철없는 존재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이 세상에 온 이 하느님 같은 새 생명을 지키고 보살피고 기르는 데에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의 다른 표현인 모성이 필요합니다. 이제까지 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시간, 그 가운데서도 추상화되고 등질화된 인공의 시간표에 따라 새 생명을 키우고 교육시킬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힘만으로 잃어버린 낙원 에덴 동산을 복원할 수 있으리라는 꿈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아직도 '유전공학'이니 '게놈 프로젝트'니 하는 첨단과학의 탈을 쓴 야바위놀음 형태로 우리의 의식을 가위누르고 있습니다. 이 야바위 놀음을 끝장내고 말짱한 의식과 활짝 깬 눈으로 죽음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무엇인지, 그 가운데서도 지구 생명계가 무엇인지, 또 그 가운데서도 사람이라는 생명체가 무엇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릇된 인식 틀이 바뀌고 바른 길로 접어들어 인류와 다른 생명체를 포함한 지구 생명계에 '지속 가능한 미래'가 열립니다.

시 시간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왜냐하면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듯이 죽음은 시간 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나가는 이야기로 '생명의 시간'이니 '자연의 시간'이니 '인간의 시간'이니 툭툭 던지듯이 한마디씩하고 뜻풀이는 생략했습니다. 이 자리가 철학적인 시간론을 펼칠 자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게 그럴 능력도 없고요. 그러나 줄여서라도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시간에 연관되어 있으니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테두리 안에서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미리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질 체계에서는 구조가 우선하지만 생명체계에서는 기능이 우선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물질과학을 뒷받침하는 가설에 따라 형상화해낸 '비생명계'(mebiosphere-이 영어식 표현은 부정을 뜻하는 me라는 희랍어 접두사와 생명계를 뜻하는 biosphere를 합해서 제가 임시로 합성해 본 개념입니다. imbiosphere라고 해도 상관없겠지요)에서는 구조가 기능을 낳지만 생명계에서는 기능이 구조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빤한 상식인데도 사람들이 곧잘 잊어버리는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정교한 구조를 갖춘 것이라도 동력이 끊어지는 순간 기능이 정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전기 코드를 뽑아버리거나 축전기를 제거해버리면 최첨단 슈퍼컴퓨터도 원시적 컴퓨터나 마찬가지로 먹통이 되고, 아무리 건강하고 머리 좋은 사람의 신체기관이나 두뇌회로도 숨길이 끊어지면 유산된 아이나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제가 물질과학의 작업가설에 바탕을 둔 유전공학이나 게놈 프로젝트 같은 것을 야바위놀음이라고 단칼에 내리치는 까닭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 마치 생명의 기능이 단백질 배치구조에서 생긴다고 여기는 듯하고, 그런 전제를 바탕에 깔고 유전자 조작이라는 불장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불장난은 잘못된 교육의 산물입니다. 문제는 동력입니다. 움직이는 힘입니다. 시간의 비밀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주 기계적으로, 현대적으로, 유행하는 말에 따라, 표현하자면, '생명체는 동력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으니까 생명체라고 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체를 살리는 힘이 몸 안에 깃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 힘이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나오고, 언제,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생명계의 층위와 종과 개별 생명체의 테두리와 특성이 결정됩니다. 여기에서 생명계와 물질계의 상호침투가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에서는 기계와는 달리 생명체가 외부 동력원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 움직이는 힘을 스스로 생산해내고 재생산해낸다는 것만 밝혀두기로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자연의 시간은 온통 다 빠져버리고 인간의 시간, 그 가운데서도 시계로 대표되는 인공의 시간만이 지배하는 거대 도시에서 대사 기능의 대부분을 외부 동력에 의존하는 '기계인간'들을 생명체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이냐 말아야 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자리에서 인공지능을 가지고 제 힘으로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인조인간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생명가치로 따질 때 그 값은 길가에 지천으로 돋아나는 강아지풀에 미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왜냐고요? 강아지풀은 스스로 제 모습을 빚어냅니다. 생명의 시간, 자연의 시간 속에서요. 그러나 인공지능 로봇은 사람 손으로 부품들을 조립해서 만들어지고 그것을 움직이는 동력도 외부에서 주어집니다. '인간의 시간', '인공의 시간' 속에서요.

'연의 시간'과 분리되어 추상화되고 공간화한 '인간의 시간'이 삶의 기능(이것은 생존 가능성이기기도 합니다)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작은 일화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지요. 여기, 이 도시 공간 어느 곳에 과일 가게가 있다고 칩시다. 거기에 먹음직스러운 참외가 있네요. 자라면서 이 도시 밖을 한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대여섯살난 꼬마가 손가락으로 그걸 가리킵니다. 엄마가 사서 아이에게 깎아 먹입니다. 아이가 맛있게 먹습니다. 엄마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쉽니다. 이 엄마는 시골 출신입니다. 지금 이 아이는 한겨울에 별미 삼아 철없는 참외를 아무런 의식 없이 먹지만 엄마는 한여름에 제철에 나는 참외를 먹었습니다. 원두막에서요. 엄마가 시골 원두막에서 한여름에 먹었던 참외와 아이가 도시 아파트에서 냉장고에 넣었다 꺼내 먹는 참외는 겉모습과 맛이 같을지 모르지만 같은 참외가 아닙니다. 엄마는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얗고 예쁘고 배가 통통한 참외 씨를 잘 말려 간직했다가 그것을 땅에 묻어 싹이 트고 잎이 나고 덩굴이 뻗고 노란 꽃이 피고 작고 파란 참외가 앙징스럽게 커서 노랗게 익는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따라서 엄마가 원두막에서 부엌칼로 깎아먹던 참외는 그냥 참외가 아닙니다. 그것은 동시에 참외의 성장역사입니다. 엄마는 참외를 먹으면서 참외의 역사도 함께 먹은 것입니다. 단맛은 혀를 거쳐 위로 흘러들었지만 역사는 머리로 올라가 기억 속에 저장되었습니다. 이 엄마의 머리 속에는 씨앗 갈무리, 심기, 가꾸기가 다 저장되어 있어서 언젠가 그 참외를 스스로 길러낼 힘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러나 도시에서 한겨울에 아이가 먹은 참외는 역사가 없습니다. 적어도 그 아이는 그 역사현장에서 비켜나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앞으로도 참외 소비자는 될지 모르나 생산자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머리 속에 입력된 정보라고는 '물기가 많은 단 것' 밖에 없을 테니까요. 이 일화에서 '보기'로 등장한 것이 참외인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참외는 먹어도 살고 안 먹어도 사는 기호식품이니까요. 그러나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주곡이라면 어떨까요?

스로 제 앞가림을 못하는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다른 생명체들은 신의 특별한 은총이 없는 현실 공간에서 자연의 시간 속에 감추어진 죽음의 그림자와 맞서야 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두고 쌓아온 경험을 신체적 기억으로 바꾸어 유전정보로 코드화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능으로 전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태어나 따로 교육받지 않더라도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삶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는 힘이 생명체 안에 저절로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과보호 아래 사이버 공간에서 역사가 없는 참외를 사먹으면서 한겨울에도 런닝과 팬티바람으로 살아가는 현대판 아담과 이브는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덩달아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털 빠진 원숭이가 되어 유전되지 않은 삶의 정보를 후천적으로 배워 익힐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졌습니다. 배워 익히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명체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제 삶의 시간(이것을 자연의 시간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을 스스로 통제할 힘이 없어서, 남이 사이에 들어 통제할 때, 이 시기를 우리는 유년기라고 부릅니다. 이 통제의 주체가 '부모'일 경우에, 그리고 '부모'의 삶이 자연의 시간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지속할 때, 통제의 결과는 자율성의 강화로 나타나며 인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 조화를 이룹니다. (여기에서 '부모'는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통해서 자기의 삶을 미래까지 건강하게 지속시키고자 하는 염원을 지닌 어른들은 모두 이 '부모'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통제의 주체가 지배자이고 이 지배자의 관심이 자연의 시간, 생명의 시간과는 동떨어진 인공의 시간 속에서 지배를 영속시키는 데에 있을 때, 통제의 결과는 타율성의 내면화로 나타나며 인간의 시간은 노예적인 굴종이나 기계적인 자동인형의 습관화된 반복동작으로 귀결됩니다. 왜냐하면 지배자의 관심은 자기 지배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기르는 데에 있지 않고, 도리어 이런 힘을 점점 잃어가 끝까지 지배자에게, 지배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배자는 인간의 시간을 등질적이고 공간화된 기계의 시간에 일치시키려고 하며 인간의 유년기를 영속화하여 늙어 죽을 때까지 철모르는 유아 상태로 묶어두려고 합니다.

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유아교육과 연관해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에 조금 더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음을 느낍니다. 앞에서 저는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사람은 유전정보의 형태로 물려주고 물려받는 신체적인 기억인 본능에 의존해서만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의 시간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인간의 시간을 따로 마련해서 살길을 찾아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시간'은 다시 '문화의 시간'과 '문명의 시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다시 예를 하나 들지요. 이것도 다른 자리에서 언젠가 한번 들었던 예이고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대장간이 있고 쇠붙이를 잘 다루는 대장장이가 있습니다. 이 대장간에는 크게 보아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호미, 낫, 괭이, 삽, 쇠스랑, 보습 따위를 벼리려고 오는 사람들이 한 부류이고, 칼, 창, 철퇴, 화살촉 따위를 벼리려고 오는 사람들이 또 한 부류입니다. 대장장이는 주문에 따라 어떤 때는 호미나 낫을, 또 어떤 때는 칼이나 창을 만듭니다. 쇠붙이를 벼려서 쓸모 있는 도구를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맡기는 사람과 도구의 쓰임새는 아주 다릅니다. 앞사람들은 농사꾼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주문하는 농기구들은 자연과 교섭하는 데에, 이를테면 받을 갈고 김을 매고 풀이나 나무를 베는 데에 쓰입니다. 이 연장들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매개하고 통일시키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문화의 산물입니다. ('문화'에 해당하는 서양말 culture영어, Kultur독일어, culture불란서어 의 어원이 라틴어 과거분사 cultus이고, 이 낱말은 colo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인데, colo라는 동사는 '경작하다', '밭을 갈다', '곡식을 가꾸다', '기르다' 같은 뜻을 지니고 있음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이와는 달리 칼과 창 따위를 주문하는 사람들은 싸움꾼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벼리게 하는 무기들은 인간과 교섭하는 데에, 이를테면 다른 사람을 위협하여 굴복시키거나 그러려는 사람과 맞서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죽여서 제 잇속을 차리려 들거나 그러지 못하게 막으려는 데에 쓰입니다. 이 연장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문명의 산물입니다. (다시 '문명'이라는 뜻을 지닌 서양말 civilization영어 -독일어나 불어도 글자와 발음 차이가 조금 있을 뿐 같습니다.- 이 도시와 시민에 연관되는 라틴어 civilis, civis에서 나왔음을 상기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똑같은 일터에서 똑같은 쇠붙이를 다루더라도 대장장이가 삽이나 보습을 벼리는 시간은 '문화의 시간'이고 철퇴나 화살촉을 벼리는 시간은 '문명의 시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해도 상관없습니다. 농사꾼이 괭이로 땅을 일구는 시간은 '문화의 시간'이고 사람들이 싸움터에서 서로 맞서 칼과 창을 휘두르는 시간은 '문명의 시간'입니다.

이처럼 학이나 기술, 또는 과학기술은 문화에 봉사할 수도 있고 문명의 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한가지 사실은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화는 대체로 사람이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고 다른 생명체와 이웃과 더불어 사는 힘을 키워주고 자율의 영역을 넓혀주는 구실을 하지만 문명은 대체로 지배와 종속을 강화하고 타인과 다른 생명체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매사를 이분법으로 흑백논리화 하려는 낌새가 있다고 의심할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뜻이 아닙니다) 저는 기회가 닿는 대로 여러 차례 교육의 궁극목표가 아이들에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러줌과 아울러 더불어 사는 힘을 길러주는 데에 있다고 강조해왔습니다. 사람도 생명체입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개별생명체입니다. 생명체가 생명체인 것은 제 삶의 시간을 제 힘으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삶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온전한 생명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공지능과 감각능력까지 갖추고 있는 최첨단 미래 로봇이 사람 발에 밟히는 질경이보다 더 못한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로봇의 기능은 그 로봇의 구조 속에 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로봇의 기능이 그 로봇의 구조를 낳은 게 아닙니다. 그것을 만든 과학기술자의 기능이 그 기계 속에 이전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경이나 강아지풀은 기능이 생명력의 형태로 구조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질경이나 강아지풀은 스스로 제 삶의 시간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그런 모습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제 앞가림할 힘을 지닌다는 것은 자기 삶의 시간을 스스로 자율적으로 통제할 능력을 지닌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 힘을 온전하게 지니고 태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서 그 힘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더 쉬운 말로 하자면 씨 뿌리고 길쌈하고 집짓는 일에서부터 건강을 지키는 일에 이르기까지 제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때까지 거들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사람 꼴이 질경이나 강아지풀만도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금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이들에게 제 삶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는 쪽으로 이끌어주는 부모의 손길, 어른들의 손길, 교육자의 손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에는 자연 속에서, 생명의 시간 속에서 마음껏 뛰어 놀게 내버려두었던 취학전 아이들마저도 이제는 도시 공간에서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문명의 시간 속에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자동인형처럼 움직이는 살아있는 기계로 바뀌고 있지 않습니까?

'간의 시간'은 사람이 삶과 죽음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는 자연의 시간 속에서 살 길을 찾는 데 필요한 시간이고 삶에 필요한 정보를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교육 시간이자 자연과 건강하게 교섭하여 먹고, 입고, 자는 문제에서 건강을 지키는 문제까지 두루 해결하는 문화의 시간이기도 하다는 이야기 끝에 이 시간을 통제하는 주체는 개별생명체인 개인이고, 개인은 교육을 통해서 개체 유지에 필요한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도시화,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점점 더 느슨해지고, 교육이라는 미명을 내세워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람을 시계라는 기계로 측정되는 인위적인 문명의 시간 속에 옭아 넣어 유년기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의구심이 지금 제 마음을 흔들고 있습니다. 말과 걸음마를 익힌지 얼마 안 되는 유아에서부터 서른에 가깝거나 서른살이 넘은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획일적으로 부과되는 이른바 교육시간표라는 것이 자연의 시간, 생명의 시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다 해 뜨는 시간 다르고 달 뜨는 시간 다릅니다. 달마다 그물에 걸리는 바닷물고기 종류 다르고 밥상에 오르는 푸성귀와 들판에서 익어가는 곡식 다릅니다. 철마다 입는 옷 바뀌고 사람이나 다른 동식물의 상태와 삶의 양식이 변합니다. 자연의 시간을 제쳐놓고 사람의 의식에 반영되는 시간, 인간의 시간만 따로 도려내서 말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치통을 앓을 때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한 시간과 월드컵 축구 대회에서 자기 나라와 이웃 나라가 접전을 벌이는 모습을 손에 땀을 쥐며 보는 한 시간은 견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시간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등질적인 실제 시간은 없습니다. 삶의 시간은 시계로 측정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도시문명에 바탕을 둔 각급 제도권 교육의 시간표는 개별 생명체의 질적인 차이를 반영하는 살아있는 시간, 사람마다 삶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아랑곳없이 날마다 똑같은 시간에 달마다 똑같은 과정을 거쳐 해마다 똑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그것을 배워 익히기를, 그것도 똑같이 앵무새처럼 머리 속에 강제 입력하기를 강요합니다. 자율성과 생명력을 박탈하는 이 노예화, 기계화 과정과 집단 교살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아이들을 이 무서운 덫에서 풀어주어야 합니다.

육의 궁극목표 가운데 개체 생존 유지 능력의 배양에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더불어 사는 힘을 길러주는 것, 곧 공생능력, 상생 능력의 함양입니다. 사람은 개별 생명체로 태어나지만 개미나 벌처럼 한데 모여 더불어 살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생명체입니다. 사람에게 사회는 '우리'라는 울타리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사회'라는 집단 생명체의 기능이 분화되어 나타나는 모습이 '개인'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긴 역사 과정을 통해서 가족에서 씨족으로, 씨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인류로, 인류에서 생태계, 지구 생명계 전체로 공생의 범위를 넓혀온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삶의 단위가 이렇게 커진 데에는 자율보다는 통제가, 평화로운 결속과 연대보다는 총칼을 앞세운 억압과 강권이, 사랑보다는 증오가, 소박한 욕구보다는 탐욕이 더 큰 몫을 한 듯이 보입니다. 니것내것 없이 함께 나누며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살던 원시 공동체사회 울타리가 허물어지고, 오로지 사람을 노예로 부리거나 팔아먹을 욕심에 눈이 멀어 걸핏하면 전쟁을 일으키던 고대 노예제사회를 거쳐, 양반 자식들은 아무리 덜떨어졌어도 억압과 착취의 자유까지 누리는 반면에 상놈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날고기는 재주가 있어도 고개 들 자유마저도 박탈당하는 중세 봉건제사회의 가혹한 신분질서를 경험하고, 오늘에 이르러서도 탐욕에 눈이 멀어 돈만 된다면 땅이 죽는 것도 물이 썩고 공기가 더럽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비정한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족쇄에 묶여 소수의 유한계급을 위해서 다수의 민중들이 임금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역사 과정을 일별하면 부정적인 생각은 더 강화됩니다. 그러나 현상보다는 본질이 더 중요합니다. 삶의 울타리가 넓어지고 작은 삶의 단위가 더 큰 삶의 단위로 통합되는 데에는 그만큼 큰사랑이 필요합니다. 배타성으로 드러나는 이기심의 가시바늘에 찔리면서 눈 질끈 감고 끌어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가족 이기주의, 소집단 이기주의, 민족애를 가장한 국가 이기주의, 세계주의로 치장한 인간중심주의를 차례로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꿈같은 생각이라고 코웃음칠 분도 있을 겁니다. 피비린내 나는 계급투쟁의 역사 과정을 떠올리면서 살이 떨리는 느낌에 사로잡힐 분도 있을 겁니다. 어떤 분은 이웃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 개 짓는 소리가 들려와도 서로 오가지 않고, 창과 칼을 녹여 괭이와 보습을 만들고,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잔머리 굴리지 않고 몸으로 떼우는 작은 나라, 오붓한 모둠살이를 내세운 노자의 이상에서 위안을 얻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되었건, 캄파넬라의 태양나라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되었건, 폐쇄된 지역공동체만으로는 완결된 공생의 단위, 상생의 단위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한 지역에 흉년이 들어 모두 굶어죽을 형편에 놓이면 자식새끼들을 서로 바꾸어 잡아먹으면서라도 살아남으려는 게 인간의 생존본능입니다. 그러면서도 머리맡에 마지막 남은 벼나 보리 씨앗을 베고 굶어죽는 게 또한 인간의 생존 본능이자 이성적 판단이기도 합니다. 이런 극한상황에 이르렀을 때, 손 벌리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도와줄 이웃이 필요합니다. 노자가 그리는 이상촌에는 그런 이웃이 안 보입니다. 그런 사랑이 안 보입니다. 꿈에도 그리워 뒤돌아보게 되는 그 오붓하던 원시공동체마을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흉년이 들어먹을 것이 없어 떠돌다가 서로 만나면 죽이거나 잡아먹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 먹을 것도 없는데 이웃을 돌볼 겨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전쟁 포로를 잡아 노예로 팔아먹었던 그리스나 로마의 장군들은 그 행위가 치가 떨리게 가증스럽기는 하지만 생산력이 그만큼 발전하여 노예가 저 먹을 것 이상을 생산하던 시대 상황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이 비인간적인 노예제사회도 탐욕스러운 노예소유주들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우거나 칼과 창을 벼리는 대장간에서 일부러 불량품을 양산하는 노예들의 봉기와 저항, 태업이 실마리가 되어 무너집니다. 그리고 이 끔직한 제도를 무너뜨리는 데에는 스파르타쿠스 같은 해방노예의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중세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근세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데에도 살육의 도구인 총과 칼에 맞서 생산의 도구인 괭이와 낫을 휘둘렀던 전봉준 일행 같은 인간 해방의 불타는 사랑이 뒷받침되었습니다.

제 더 큰사랑이 필요합니다. 다양성이 결여된 단세포적이고 추상적이던 '온생명'이 분열하면서 다시 더 큰 하나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생명의 시간, 자연의 시간이 전개됩니다. 생명의 기능이 죽음의 위협에 맞서 더 큰 하나를 지향하면서 모습을 바꾸어 가는 창조의 과정은 다양한 생명체들을 낳는데, 이 다양성의 확대가 진화의 참모습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생명의 바다에서 어느 순간 사람 모습이 빚어졌습니다. 너무 굼떠서 다른 생명체처럼 재빠르게 과거 삶의 체험을 신체적 기억으로 전화시켜 유전정보의 형태로 후손에게 물려주어 살길을 찾게 하는 데에 실패한 이 털 빠진 원숭이는 자연의 시간 곁에 인간의 시간을 따로 마련하여 후손들에게 생존훈련을 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는 이 훈련 과정을 '스스로 살아남기', '더불어 살아남기'라고 부릅니다. 초기에 이 인간의 시간은 자연을 큰 스승으로 삼고 마을 어른을 작은 스승으로 삼아 끊임없이 재생 가능한 생체 에너지를 써서 텃밭을 일구고 짐승을 기르고 화덕에 불을 피우고, 대장간에 가서 호미와 낫을 벼리고, 일하다 힘들면 허리 펴고 흥얼거리다 술 한잔 걸치면 어깨춤을 덩실거리던 '문화의 시간'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생산력이 높아지고 남아도는 잉여생산물이 나타나면서 몸으로 때우는 대신에 잔머리 굴리고, 더불어 살 길을 찾는 대신에 저 혼자 잘 살려는 탐욕스러운 한줌의 무리들이 도시를 근거지로 삼아 창과 칼을 벼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배계급의 지배욕과 탐욕이 문화의 시간을 문명의 시간으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세 봉건제 농경사회가 근세 자본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이 변질은 가속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인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 생명의 시간과 점점 더 동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가속화된 변질의 중심축에는 동력원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세 농경사회까지 생산력을 발전시켜온 주된 동력원은 사람과 길들인 짐승의 힘, 곧 인력과 축력이라는 생체 에너지였습니다. 이 동력원은 늘 재생될 수 있고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청정에너지였고 자연친화적인 에너지였지만 지배계급의 탐욕을 채워주는 데에는 비효율적인 에너지였습니다. 문명의 시간은 도시공간 안에서 증기기관을 만들어내고, 내부 동력원인 생체 에너지 대신에 외부 동력원인 화석 에너지, 곧 석탄과 석유가 세계지도와 수천년을 지속해왔던 삶의 양식을 삽시간에 바꾸어 놓았습니다. 노예소유주와 지주라는 지배계급을 대신해서 자본가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나타났습니다. 자본가계급은 자연친화적인 문화의 시간보다 기계친화적인 문명의 시간을 더 선호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연을 이루는 생명체들은 모두 유기물들이어서 가공과 장기보존에 한계가 있는데 이 새로운 지배계급의 탐욕은 끝가는 데를 몰라서 늘 새롭게 가공할 수 있고 수천년, 수만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무기물에 더 호감이 갔으니까요. 본디는 사이가 어정쩡하거나 소원했던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동력원을 매개로 찰떡궁합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과학기술문명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자본계급은 산업도시에 근대화한 공교육기관을 서둘러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전인교육을 내세웠지만 진짜 목적은 산업사회에 맞춤된 기계인간과 나사못을 짧은 시간 안에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의 시간 속에서 마을 공동체가 학교 구실을 할 때는 큰 선생님인 생명공동체의 구성원들, 곧 자연을 빼놓고도 아이 하나를 교육시키는 데에 온 마을 사람들이 다 교사로 달라붙었습니다. 그리고 교육은 자연의 순환에 맞추어 살아있는 현실공간에서 실시간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을 강제로 책상머리에 붙들어 앉히거나 네모난 상자 안에 몇 십명씩 우격다짐으로 가두어두는 일은 없었습니다. 감시와 처벌도 없고 일등에서 꼴등까지 줄을 세워서 한 아이를 뺀 모든 아이들을 열등감에 시달리게 하는 악몽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하면서, 그리고 화석 에너지가 이 사회의 생산력을 뒷받침하면서 부족한 일손을 공장으로 돌려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기계는 잠 잘 필요도 없고 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이 기계에 붙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이 하나를 마을 전체가 지켜보면서 교육시킨다는 것은 어림반푼도 없는 낭비로 여겨졌습니다. 시간은 돈이었습니다. 내 시간은 아끼고 남의 시간은 많이 뺏을수록 돈벌이에 유리했습니다. 시간을 아끼려면 밤낮의 구분도 없애야 하고 해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지면 자는 생활 습성도 뜯어 고쳐야 했습니다. 이 일을 전문으로 맡아서 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한 반에 몇 십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몰아넣고도 통제할 수 있고, 자연의 시간을 아랑곳하지 않고도, 그리고 더불어 살 힘을 길러주지 않아도 산업사회의 역군과 산업예비군으로 바꿀 수 있는 초인이 교사라는 이름으로 훈련되고 양성되었습니다. 더불어 살 힘을 길러준다는 교육의 궁극목표는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힘을 길러준다는 목표보다 더 불온하게 여겨졌습니다. 더불어 살 힘을 길러주면 임금노예인 주제에 상전인 자본가에게 같이 살자 하고, 혼자 잘살겠다고 버티면 자기들끼리 곧 동아리를 이루어 자본가에게 맞설 것입니다. 이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서열화시키고 경쟁을 붙여서 갈기갈기 찢어지고 흩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통제에 순응하고 자율성을 잃게 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철없이 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보다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교육의 직접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은 무한히 늘어나고 무한히 커지는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신화를 모두 믿게 하고, 빵만 키워놓으면 누구나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야바위 놀음을 그럴싸하게 여기도록 세뇌시켜야 합니다. 화석 에너지가 재생 가능한 에너지가 아니고 양이 한정되어 있으며 확산에너지여서 그 가운데 낭비되어 산업폐기물이나 쓰레기 형태로 대기나 토양이나 수질을 오염시키는 비율이 80%가 넘는다는 사실은 비밀에 붙여져야 합니다.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은 지구라는 한정된 자원의 벽에 부딪치고,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인간중심주의는 생명계 전체를 위기에 빠뜨려 결국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바꾸자는 저승사자의 주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감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은 늘 교과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뒤로 수십만년 동안 땀흘려 일하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배우고, 노예로, 농노로, 임금노동자로 전전하면서도 점점 더 커가는 사랑의 힘으로 노예상태에서, 신분의 질곡에서, 소외된 노동과 가당찮은 탐욕으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인류만 더불어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구 생명계를 이루는 모든 생명공동체가 다 함께 같이 더불어 살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류에게 미래가 없다는 자각에까지 이른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자본주의에도 자본계급에도 미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하트마 간디의 말대로 아직 이 지구에는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고 상생하고자 하는 건강한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생명자원이 있지만, 이 자원은 자본가 한 사람의 탐욕을 충족시켜주기에도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탐욕에 맞서서 우리 아이들을 지켜내야 합니다. 이 아이들을 자연의 시간과 이어진 문화의 시간으로 안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삶과 사랑과 자유가 하나임을, 그리고 그 하나됨은 살아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살 힘이 붙을 때 이루어 질 수 있음을 깨우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 자리는 바로 그 다짐과 더 큰사랑으로 죽임의 세력에 맞서는 결의의 자리라고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윤구병

이 글은 2002년 6월 한국생태유아교육학회 창립총회에서 강연한 글입니다.




보리

보리 2010-06-15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수익이 나면 다시 책과 교육에 되돌리자. 보리출판사의 출판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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