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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AROUND에 실린 《보리 국어사전》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출처: AROUND 2016년 1월호)

 

 

 

사전,
말이 오는 곳

 

 

《보리 국어사전》
보리출판사, 토박이 사전 편찬실

 

“사전은 누가 읽을까?”라고 물으면 선뜻 대답할 이가 있을까. 사람들은 가끔 그저 두꺼운 책쯤으로 사전을 오해한다. 사실 사전은 손을 움직여 찾고, 읽고, 말하고, 대화하는 행위가 총체적으로 들어찬 언어의 집이다. 그 집을 13년에 걸쳐 짓는 이들이 있다. 13년이라는 시간은 사전이란 단어 앞에서 금세 지나갔다.

 

에디터 이현아  |  포토그래퍼 안선근

 

 

 

말이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도록


일주일에 한 번,퇴근하고 가는 시 수업에서 선생님이 "아름다움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열 명 남짓한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열 명 모두 다른 대답을 했다. 아름답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다른 정의로 살아가지만,우리는 그 표현을 불편함 없이 주고받는다. 사전에서는 '아름답다'는 말을 '생김새,소리들이 곱고 예쁘거나 마음씨,행동들이 착하고 갸륵하다'고 정의 한다. 그 말은 열 명의 정의를 해치지 않는다. 이런 보편적 정의는 어떻게 태어나는 걸까? 궁금증을 안고 보리출판사로 향했다. 얼마 후 나는《보리 국어사전》을 만든 윤구병 선생 앞에 앉았다. 하지만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 전,몇 가지 질문을 먼저 들어야 했다. "담론이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요?", "가문돌은 어떤가요?","우리가 만약 다시 전기가 없는 상황에서 살게 된다면 무엇으로 생각을 주고받아야 할까요?"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선생은 그가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나갔다. 언뜻 엉뚱해 보이는 질문과 대답을 엮었다. 그건 말이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는 사전을 만드는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첫 번째 질문


만약에요.
우리가 다시 전기가 없는 곳에서 살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날마다 새로운 말이, 새로운 개념이 생긴다.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생겨나고 쓰인다. 열일곱에 처음 폴더폰을 갖게 된 나는 지금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메일을 쓰고, 영화를 본다. 우리는 날마다 앞으로 나아갈 것 같고, 새로운 것은 끊임없이 좋을 것 같다. 그냥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다시 전기가 없는 곳에서 살게 된다면? 이 질문은 그럼에도 종이 사전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윤구병 대표가 내게 처음 던진 질문이었다. 질문을 받자 앞이 깜깜해졌다. 전기가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지 않아도,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이 없다는 생각만 해도 갑자기 갈피를 잃는다. 그렇게 혼자 깜깜해져 있는 사이,윤구병 선생은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글을 갖게 되고 소통하게 된 이후로 어느 나라에서나 사전을 만들었어요. 표준 발음을 정하고, 표준말을 만들었지요. 말은 일정한 거리를 넘어서면 주고받을 길이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글은 그런 제약을 벗어나니까요. 삶의 단위가 넓어지게 되면 글의 쓰임새가 커지게 되었지요. 우리는 지금 물질문명의 세상에 살고 있어요. 이게 앞으로의 추세인 것 같고 지속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인간이 전기가 없는 상황 속에서 다시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삶에 필요한 정보는 어떻게 주고받아야 할까요?" 그는 사전은 '알맹이'라고 말했다. 기본이 되는 사전을 곁가지로 여기고, 전자사전이나 인터넷 사전을 알맹이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 해봐야 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사전이 서로 풀이를 베끼고, 우리말보다 한자어가 많고, 외래어를 우리말처럼 싣는 것을 보면서 그는 알맹이가 튼튼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수요가 줄어 개정조차 어려운 현실 속에서, 말리는 사람이 더 많은 사전을 제작하는 일을 그가 밀어붙인 것은 이 알맹이를 알차게 여물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보리 국어사전》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 질문

 

플로피 디스켓, 테이프 레코더
이 단어들 기억나나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은 요즘 본래 뜻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10년이라는 시간이 가기 전 수도가 바뀌기도 하고,심지어 나라가 없어지기도 한다. 정권이 바뀌면 정부 기관의 명칭도 바뀌고, 교과서와 어문 규정도 바뀐다. 그리고 친구들은 자연스레 새로운 준말로 내게 말을 건넨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어떻게 새로 생겨나는 수많은 단어를 사전에 반영하는지 궁금해졌다. 그 과정에서 오는 어려움도 듣고 싶었다. 그러자 사전 편찬실 식구들과 윤구병 선생은 더하기가 아닌 '덜어내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렇게 온 것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사람들이 새로운 말들을 많이 만들어냈어요. 그 말 들은 대부분 기계 문명과 연결된 말이지요. 기계 문명이 몰락하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요. 활판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가 신문을 찍을 때 활자를 골라서 글자를 찍었잖아요. 활판 인쇄에 관련된 말은 거의 사라졌어요. 컴퓨터에 관련된 용어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 많지요? 그때 그때 생겨났다가 거품처럼 사라지는 말들을 사전에 다 담는다면 사전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을까요?" 말하자면 오래오래 세월을 견더낸 말들,수백 년 수천 년 견뎌내오면서 우리 삶에 중요한 몫을 한 낱말들은 그대로 되살리고 살아있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태어나 '엄마', '아빠' 라는 말을 맨 먼저 하죠. 그건 아이가 가장 쉽게 낼 수 있는 발음과 말에 가장 중요한 뜻을 담은 단어예요. 이 세상에 엄마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요. 엄마와 아빠, 몸과 맘, 배, 발, 바람, 비, 물, 불. 이 단어들은 인류가 지구에 살면서 수천 년,수만 년 가져온 것이에요. "그는 만약 '담론'이라는 단어가 보리 국어사전에 실려 있다면 그 단어를 빼고 이야기라는 단어를 싣겠다고 했다. 다섯 살 아이도, 까막눈인 시골 할아버지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담을 것이라고. 그 말은 다소 강한 말투로 들려왔지만 그 속에서 말이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에 대한 그의 걱정이 느껴졌다. "말도 살아있는 것이고,살아있는 말을 반영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삶이에요." 우리가 그런 말을 써서 삶이 더 넉넉해질까? 의사소통이 더 원활해질까? 생각해 볼 일이다.

 

 

※세 번째 질문

 

'가문돌'이란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올라요?

 

 

윤구병 선생이 국민학교에 다니던 1950년대에 제대로 된 사전을 갖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가끔 상을 타면 받을 수 있었던 사전을 보던 그가 스물이 되어 처음 한 일은 한글학회에서 나온 여섯 권으로 된《우리말 큰사전》을 산 것이다. 기역부터 히읗까지 날마다 삼십 분씩, 때로는 한 시간씩 들춰 봤다. 그러다가 우리말만 따로 옮겨 적고 스스로 뜻을 풀어 적기도 했다. 그가 적어 내려간 우리 말에는 기억이 담겨 있었다. "서울에 현석동이 있고, 흑석동이 있어요. 알지요? 풍납동도 있고요. 흑석동은 검을 흙, 돌 석 자를 써서 흑석동이라고 하는데, 원래 우리말로는 '가문돌'이었죠. 한강 물이 흘러내리다가 거기에 바위가 튀어나와서 물이 바위를 감아서 돈다고 하여 붙은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 동네에 가보지도 않고, 살아보지도 않은 책상머리 앉아있는 사람들이 이걸 '가문돌? 검은돌?'로 단순화해서 흑석동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그런데 밑에 가다 보니 돌이 하나 더 있는 거예요. 이미 하나는 흑석동이라고 썼으니 현석동(검을 현)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그런데 흑석동이나 현석동이라는 말을 들을 때 무슨 생각이 들어요? 아무 생각도 안 나지요? 그런데 이걸 '가문돌'이라고 하면 물이 감아 도는 모습이 상상이 돼요. 풍납동도 마찬가지예요. 바람 풍, 들 납 자를 써서 풍납동인데 한자 를 듣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요. 그런데 '바람들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가요?" 선생이 하는 말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가 생각하는 살아 있는 사전은 우리 세대만이 소통하는 말이 아 닌 자라고 있는 새로운 세대를, 또 그다음 세대를 함께 생각하는 말을 담은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훅석동이 어떤 동네나고 누가 물었 을 때 '가문돌'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네 번째 질문


글이 글로서, 그림이 그림으로서
저 혼자 완벽할 수 있을까요?

 

 
《보리 국어사전》에서 세밀화를 찾아보면 '본디 모습대로 꼼꼼하고 세밀하게 그린 그림'이라고 적혀있다. 보리출판사에서는 1995년부터 세밀화 작업을 해왔고 그들이 만든 사전에는 사진이 아닌 세밀화가 실려 있다. "보통 사전들이 글로 많이 이루어져 있죠. 하지만 글은 글이 갖는 한계가 있고, 그림은 그림이 가지는 한계가 있어요. 예를 들어 베틀을 아이들에게 설명할 때, 글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림으로 씨실과 날실이 어떻게 교차하는지 보여주면 이해하기 쉬워지잖아요." 박영신 디자이너는 글은 글로서 완벽하지 못하고 그림도 사진도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이 아니기에, 각자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서로 돕는 방식을 택했다고 했다. 사전에는 3,034개의 세밀화와 70개의 사진이 실려있다. 그림이 아니라 사진으로 실었으면 값도 싸고 힘도 덜 들었을 것이다. 그런 의문에 대해 묻자 윤구병 선생은 한 개체의 특징을 살피려면 한 곳에 초점이 맞는 카메라가 아니라 곤충의 털 끝 하나하나에, 식물의 실뿌리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추는 세밀화가 더 알맞다고 말했다. "세밀화를 그리는 사람의 눈은 살아있는 눈이지요. 어디서 봐도 초점이 맞아요. 그래서 생명체의 따뜻하고 생생한 느낌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돼요. 특히 아이들에게요. 어른들은 정보에 대한 판단력이 있고 찾아볼 힘이 있으니 상관없지만 아이들에게는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것만을 보여줘야 해요."

 

 

사전을 만드는 과정
 
올림말(표제어) 선정
어떤 사전을 만들 것인지 기획이 완료되면, 사전에 들어갈 단어를 선정한다. 사전에 실을 올림말을 선정하는데는 꼬박 4년이 걸렸다. 1차부터 7차까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단어를 입력하고, 학급문고와 문집, 아이들이 쓴 일기, 만화, 교사용 지도서 등을 참고해서 모았다. 북한 말을 선정할 때는《조선말대사전》과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있는 북한 교과서, 문학작품과 문집, 도감 등을 최대한 반영했다. 7만 개에 가까운 단어들을 모은 뒤 그중 4만 단어를 추렸다. 토박이 사전 편찬실의 김미혜 대표는 교과서와 참고 자료를 읽으며 하나하나 단어를 모으는 과정을 단순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읽으면서 아이들의 말 수준과 언어의 범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뜻풀이 쓰기
올림말이 결정되면 풀이말을 쓴다.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의 뜻을 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전이니만큼 뜻풀이팀은 해설에 관한 전문 지식을 갖고 있되 주로 초등학생 자녀를 가진 사람을 먼저 뽑았
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이 일을 도운 사람은 40여 명에 이른다. 팀 이 정해지면 똑같은 올림말을 나누어 풀고 서로 바꾸어 검토한 다음 그중에서 다른 사전과 같은 풀이를 걸러내고, 신선하고 쉬운 풀이는 더하며 마지막으로 편집부에서 뜻풀이를 확정한다. 고적, 옷, 꽃, 버섯 등 전문적인 분야는 말의 갈래를 나누어 전문가가 검수했다.

 

디자인
전통적인 체계 방식이 있는 사전은 디자인이 개입되기 어려운 책이다. 또한 일반 사전의 경우 본문 사이에 그림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증쇄할 때 수정을 하면 그림이 밀려 몇 백 페이지, 몇 천 페이지가 바뀐다. 도저히 수정 할 수 없는 방식인 것이다. 박영신 디자이너는 그 점을 보완하고 세밀화도 돋보이게 한 페이지를 세로로 삼등분을 하고, 가운데 공간에 그림을 넣는 새로운 형식으로 사전을 만들었다. 본문 사이사이에는 곡식, 나무, 몸, 살림 살이 등 26가지 주제를 짧은 글과 함께 관련되는 그림들을 여럿 모아 모둠 정보로 보여 주었다. 어여쁜 우리말은 표지 디자인에 담아 소개했다. 그들이 말한 대로 '크지만 다부진 사전'의 모습이다.
 

 

 


사전. 사전. 사전. 사전. 사전. 한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다 보면 말이 흐려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꼭 이 단어와 처음 마주한 기분이 든다. 뜻과 음이 헷갈리고 가끔은 내가 이 단어를 아는 게 맞나 하는 생각에 이른다. 한 단어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말도 하나의 방식으로 올 때 쉽게 혼란스러워진다. 모른는 단어가 있을 때는 사전을 펼쳐 보면 어떨까. 손을 움직여 단어를 찾아서 읽고, 말하고 쓸 때, 그 단어로 상대방과 이야기할 때, 그래서 몸이 말을 기억할 때, 언어의 집은 문을 연다. 말은 그렇게 온다.

 

보리

보리 2015-12-28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수익이 나면 다시 책과 교육에 되돌리자. 보리출판사의 출판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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