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 중국!》
이 책은 내가 쓴 첫 책이다. 1989년 공부를 시작했고, 1999년 교수가 되었다. 첫 책이 나오는 데 족히 이십 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패한 사학 재단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4년을 빼고 나면 남보다 공부를 크게 게을리 한 적은 없었다. 남들처럼 한다면 발표된 논문만 엮어도 이미 서너 권은 나왔어야 했다. 《현대 중국을 찾아서》를 번역할 때 들인 노력을 생각한다면, 쉽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출판사에서도 그런 책을 내자고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런 책을 내고 싶지가 않았다. 학자로서 명성을 얻고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데 필요하다고 여기는 작업이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까닭은 간단했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하는 학자가 되기 싫었던 것이다.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중국과 관련된 일을 할 때 참 갑갑했다. 저명한 중국학자들은 현재의 중국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이들은 사회주의 중국 이전 중국에만 관심이 있었다. 현재는 늘 바뀔 수 있어서 학자의 판단을 흐리게 할 수가 있다는 그럴싸한 논리를 폈다. 중국학계는 그런 이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사실 좀 웃겼다. 이미 중국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고 있었다. 중국학자들이 그런 중국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중국이 제자리 머물러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기업과 정부, 여행자들은 새로운 중국과 마주쳐야 했다. 새롭게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졌다. 중국 연구자들이 침묵하면 어떻게 될까? 몇몇 힘 있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실제로 그랬다. 국정원과 몇몇 관변 학자들, 그리고 보수 언론이 중국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들이 독점으로 주무를 수 있는 까닭이 있다. 해방 이후 우리가 갖는 중국관은 하나였다. 주류의 중국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공체제에서 식민지화되고 타율로 해방이 됐다. 그런 한국에서 주류 중국관이 온전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비판이 없었다. 토론이 되려면 비주류가 주류 중국관에 딴죽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 거의 리영희 선생님뿐이었다. 리 선생님의 딴죽은 주류의 절름발이식 중국관이 제대로 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리영희 선생님을 이어 가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중국학계에도 이 땅의 진보를 위해 애쓰는 분들이 많다. 진보진영으로 불리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리영희 선생님처럼 한국 주류의 중국관과 싸우지 않는다. 그이들은 자기 글이 한국 현실에 어떤 기능을 할까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오히려 자기 글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완벽할까에 관심이 더 많았다. 중국의 중국관과 싸우거나 동아시아를 관념 속에서 멋지게 세우는 일에 주로 관심이 많았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보수주의자가 중국에 대한 어떤 견해를 밝혀도 무사통과 되었다. 간혹 논쟁이 있어도 그이들만의 관심사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중국과 관련된 학회란 학회는 대부분 사교 모임 같다.
문제는 한국의 중국은, 늘 주류가 정의하는 중국이 주도권을 모두 행사한다는 것이다. 중국이라는 국가와 진영을 형성할 때 우리 안에는 적이 있을 수 없다. ‘적은 신자유주의이고 중국은 그것을 쫒아가는 대표 국가이다. 중국은 대국주의를 쫓는다. 우리는 하나 되어 그들과 싸우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 지금 한국 중국학자들의 글들은 대부분 이처럼 ‘중국은 이렇게 문제가 많다’는 틀 안에 있다.
결국 한국의 중국학계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평화롭다. 대표 진보학자로 대접 받는 어떤 학자는 주류보다 더 열심히 권력을 쌓는 일을 버젓이 하고 있다. 어떤 언론과도 손잡고, 어떤 학자와도 함께한다. 그리고 그 힘을 빌어 ‘중국은 이렇다’라고 정의하려는 패권적 욕망까지 드러낸다. 그 와중에 대중들 인식에 자리 잡고 있는 중국은 우리를 직접 통치한 일본보다도, 실제 패권을 휘두르고 있는 미국보다도 더 나쁜 국가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해방 이후 중국에 대한 인식은 오늘도 무사하다.
이 책의 출발점은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2000년 6월에 쓴 <동양사 연구자들의 객관주의 신화 비판>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당시 언론에 “한 소장 학자가 민두기 스쿨 객관·엘리트주의 사학 비판을 했다”며 특필될 만큼 화제가 되었다. 동양사학계를 이끌고 있었던 민두기 교수를 포함한 거물들의 이름을 드러내 비판한 것이 화제가 된 가장 큰 까닭이었다. 그이들의 논리가 “20세기 한국 사회를 지배한 권력 담론과 동일한 텍스트로 짜여 있었다”며 주류 담론에 정면으로 비판한 것도 화제가 되었다.
그 글을 쓰며 몇 가지 각오했다. ‘이제 학계에 발 부칠 생각 말자. 연구비 받을 생각도 말자. 어쩌면 내 논문을 실어 줄 지면이 없을지도 모른다. 승진하지 못해도 버틸 수 있는 대안을 찾자.’ 최근 청와대 게시판에 어느 고등학생이 ‘죽기를 각오하고’ 글을 올린 심정을 잘 이해한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좀 오버하는 것 같겠지만 본인은 그렇게 느끼는 거다.
나는 학계에서 자의반 타의반 왕따가 되었다. 연구비는 아예 받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다행히 몇몇 잡지가 내 글을 실어 주었다. 그래서 아직 대학에서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다.
학계에 왕따로 등장한 것은 생각보다 이점이 많았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다. 전 국민이 역사 전쟁을 외치던 동북공정 사태조차 딴죽을 걸 수 있었다. 주류에 대한 비판 또한 마음 놓고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동북아역사재단 이거 제대로 하고 있냐.’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왕따가 되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과 글은 더욱 다져졌다. 세상이 보다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현실과 대중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내 첫 책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였으면 했다. 주류의 학계에 대한 도전. 그러나 이 또한 결국 학자들끼리 모여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는 일이라 망설여졌다. 나 역시 다른 엘리트주의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결국 대중이 변해야 역사가 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대중들이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는 일이 목적이라면 아예 직접 대중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나을 듯했다. ‘중국이 다시 돌아온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이 좀 더 중국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해 보자.’ 그런 현실과 대중에 대해 고민한 결과물이 이 책이다.
보리출판사에서 첫 책을 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책의 편집자가 내 제자였다. 겁 없이 덤비던 초임 교수 시절 제자이며, 설익은 내 학문적 주장을 변함없이 지지해 준 애독자이기도 했다. 결국 십여 년을 넘겨 내 책의 출판을 강권해 온 끝에 스스로 내 책의 산파가 되었다. 윤구병 선생님이 대표로 있는 출판사인 것도 중요했다. 《잡초는 없다》를 읽고 나서부터 열렬한 팬이었다. 변산공동체 같은 공동체를 꿈꾸며, 그런 세상과 사람을 만들고자 학생들을 가르친다.
누가 자신의 뜻을 지지해 주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그런 사람이 《태백산맥》 저자 조정래 선생님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글만리》를 읽고 당신이 못다 한 중국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조정래 선생님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내 부족한 글쓰기가 《안녕? 중국!》을 읽는 독자들이 현대 중국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김희교
광운대학교교수로 중국현대사를 전공했다. <역사비평>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다. 한국의 주류의 중국관이 가지는 문제점을 극복하고 동북아 평화공동체 형성하는 데 관심을 두고 일하고 있다.
*<개똥이네 집> 103호 '마음으로 만든 책'에 실린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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