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제가 펴낸 책 <철학을 다시 쓴다>의 머리말에서 저는 말이 글보다 더 앞선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느낌이 와닿지 않는 말은 빈말이고, 그런 말을 글로 옮겨 봤댔자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죽은 글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길지 않은 글이어서 <철학을 다시 쓴다> 책머리에 있는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글보다는 말이 먼저입니다.
따라서 우리 말이 우리 글에 앞섭니다.‘
말’은 입에서 나와 귀로 들어가는, 뜻을 담은 ‘소리’입니다.
‘말소리’의 숲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린애들의 놀이마당을 거칩니다.
재잘재잘 물이 흐르고, 쫑알쫑알 산새들이 웁니다.
깡충깡충 토끼가 뛰고, 머루알이 조롱조롱 달려 있습니다.
얼룩바지를 입은 새끼 멧돼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호비작호비작 흙을 팝니다.
온갖 소리 흉내, 짓 흉내가 숲을 흔들고 바람에 말 씨앗을 날립니다.
‘누리’는 ‘누르’고, ‘풀’은 ‘푸릅’니다
.
‘물’은 ‘맑’고, ‘불’은 ‘밝’고, ‘바람’은 ‘붑’니다.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하나하나 말로 영글고 ‘글’이라는 ‘그림’으로 모래 위에 그려집니다.
‘깔깔’은 웃음이 되고, ‘앙앙’은 울음이 되고,
억지로 ‘부리’는 ‘몸’은 ‘몸부림’이 됩니다.”
<개똥이네 집>에 실린 글 가운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글이
‘아이랑 함께 자라는 엄마’입니다.
이 글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사람은 엄마지만,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가을’이라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의 삶이 엄마의 눈을 거쳐서 우리한테 환히 드러납니다.
엄마의 못난 모습도 아이의 의젓한 모습도 빼고 보탤 것 없이 있는 그대로 그려지지요.
그런데 입으로는 ‘민주화’를 외치는 많은 ‘지식인’들이 쓰는 말은
우리 말이 아닙니다.
교양’을 코 끝에 내거는 '학자’와 '언론인'들이 쓰는 글을 보면
멀쩡한 사람들이 까막눈이 되어 버립니다.
세 살배기나 다섯 살배기 아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고,
글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시골 어르신들도 귀담아들을 수 있는
쉽고 깨끗한 우리 말로 글을 쓰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민주 세상’은 ‘강 건너 불’입니다.
우리 아이들한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우리 말로 참과 거짓을 가리고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고,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참’ 교육입니다.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투성이인 나쁜 세상을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벌거벗은 임금님’한테 혼날까 봐 ‘없는 것’(옷)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벌거벗은 몸)을 없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하루빨리 참 세상으로 바꾸어 냅시다.
-윤구병, <개똥이네 집>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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