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출판사 블로그

비 오는 날 텃밭이나 물 흐르는 개울가에서 느릿느릿 기어가면서

긴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달팽이를 본 적이 있나요?
집을 등에 지고 이사 가는 그 달팽이 모습이 앙증스러워서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움찔하다가도 아주 조심스럽게 기어간 뒷자리에 끈적끈적하고
햇볕에 마르면 하얗게 빛나는 자국이 남던 어린 시절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고개를 내밀고 엉금엉금 짧은 네 다리로 몸을 움직이는 거북이나 남생이보다
훨씬 느리게 배밀이를 하는 달팽이는 그래서 느림의 상징이지요.

저한테는 이 어릴 적 달팽이의 추억에 얹혀 또 다른 달팽이의 추억이 되살아납니다.
보리출판사는 60권으로 이루어진 <올챙이 그림책>을 내고 나서
세 해 뒤에 <달팽이 과학동화> 50권을 냈습니다.
보리에서 <올챙이 그림책>이 태어난 해가 1991년이었고,
<달팽이 과학동화>가 묶여 나온 게 1994년이니까
어느덧 스무 해가 넘었거나 곧 스무 해에 가까운 옛날 일이네요.
그 그림책들 두 종 다 낱권으로 쳐서 천만 부가 넘게 팔렸답니다.

지금도 가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 가운데 <달팽이 과학동화>를 보고 자랐다고
행복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달팽이 과학동화>가 그림도 다시 그리고,
뒤에 생태에 관한 재미있고 쓸모가 더 많아진 정보를 두 배로 늘여서 새롭게 단장해서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새봄을 맞아 달팽이들이 흔히 눈에 띌 때도 머지않았네요.)

지금 우리는 주어서 기쁘고 받아서 고마운 선물을 주고받는 행복을 맛볼 기회가
점점 드물어지는 세상을 맞고 있습니다
.
기쁨과 고마움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고나 할까요.

 

어떤 것이든 살아 숨 쉬는 것을 오래오래 지켜보고 있으면
그뒤에는 반드시 즐거운 깨우침이 따릅니다.
달팽이가 느릿느릿 배밀이를 하면서 지나가는 모습과

그 뒤에 남는 흔적을 지켜보려면 참을성이 있어야겠지요.

 

보리출판사가 지난 스물다섯 해 동안 묶어 낸 책이 300종에 미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면
깜짝 놀라는 분들이 많습니다
.
하기야 한 해에 500종이 넘는 책을 묶어 내는 출판사들도 있는 형편이니까요.

그러나 달팽이가 무거워 보이는 집까지 등에 지고 느리게 움직이면서도 살아남는 모습을 보면,
이 책 한 권이 나무 한 그루 베어낼 가치가 있을까,
이 책을 읽는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 또 어른들이 책을 덮으면서
서로 목숨을 주고받아야 할 나무들을 다섯 그루나 열 그루를 심을 마음을 낼 수 있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더디더디 한 권 한 권 묶어 내는
저희의 게으름(?)이 헛되지 않구나 하는 고마운 느낌과 기쁨을 함께 맛봅니다.

목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어서 목숨인 삶의 기운을
나무들과 사람들이 주고받고 나누는 모습에서
저는 날마다 주어서 기쁘고 받아서 고마움의 깨우침을 얻습니다.

 

-윤구병, <개똥이네 집> 20134월호.










편집 살림꾼 지리소

편집 살림꾼 지리소 2013-05-23

古傳을 만들면서 苦戰을 면치 못하다가, 책 만드는 일에도 사는 일에도 고전하고 있는 困而知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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