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출판사 블로그

많은 사람들이 '흰 것'은 좋은 것으로, '검은 것'은 나쁜 것으로 봅니다.
우리 옛 시인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시조까지 생겼겠지요.
그러나 나는 검은 것을 좋아합니다.
마을 어르신들의 검게 탄 얼굴과 손발이 좋습니다.
하루 종일 땡볕에 까맣게 그을은 시골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도 보기 좋습니다.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이라고 뽑내는 사람이 아직도 더러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런 식의 '민족주의'나ㅣ '애국심'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천자문'의 첫 귀절은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天地玄黃)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본디 하늘은 '검'이요, 땅은 '누리'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푸르다'가 '풀'에서 나오고 '붉다'가 '불'에서 나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밤하늘이 본디 하늘빛이고, 푸른 하늘은 햇빛에 바랜 하늘빛입니다.
'검'인 하늘, 검은 하늘은 뭇별들을 죄다 끌어안고 있습니다.
해도 달도 그 별무리 가운데 듭니다.
모든 색을 끌어안은 색도 검은색입니다.
햇빛이 들지 않는 깊은 바다도 검습니다.
그 너른 품에 온갖 물고기들을 품고 있습니다.
땅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잠과 꿈을 끌어안고 있는 '밤'이라고 다를까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왕검'은 사람이 아닙니다.
'수컷'은 더더욱 아닙니다.
세나라 시대의 우리 말로 옮기면 '밝달잇검'쯤으로 소리 났을 텐데,
이 말을 풀면 '하늘을 이은 밝(해)의 딸', 곧 '땅', '누리'로 해석됨 직합니다.
그러면 수염 길게 늘ㅇ니 우리 첫 조상은 어떻게 생겨났느냐고요?
우리 말을 잘 모르는 못난 후손들이 꾸며 낸 '남성 중심'의 그릇된 신화 해석이라는 게 이 할배의 생각입니다.
놀라셨나요?
신라시대 임금으로 알려진 '김알지'가 성은 김이요, 이름은 알지인 고유명사가 아니라
'검의 아지', 다시 말해서 '하늘의 아이'이고 중국말로 옮기면 '天子'(천자)라고 풀이하면 더 놀라시겠네요.

다음 해부터 '한글날'이 '국경일'이 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말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엇나간 '민족주의'나 '애국심'에 바탕을 둔 '국수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흰 것'만 받자하고 '검은 것'을 마다하는 편견은 버려야 합니다.

더더구나 힘센 '흰둥이'들이 서슴지 않는 이 삐뚤어진 세상에서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가위질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밤이 오면, 단잠을 이루는 온갖 빛깔의 꽃들도 모두 검은 꿈을 꿉니다.
낮에 하얀 해를 향해 풀과 나무의 새순이 발돋움하는 사이에도 뿌리는 검디검은 땅속으로 뻗습니다.

'검고 검은 것이 모든 것을 싹트게 하고 키운다'는 '노자'(老子)의 말을 되새깁니다.

-윤구병, <개똥이네집> 2012년 12월에서

편집 살림꾼 지리소

편집 살림꾼 지리소 2013-03-25

古傳을 만들면서 苦戰을 면치 못하다가, 책 만드는 일에도 사는 일에도 고전하고 있는 困而知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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