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출판사 블로그

윤혜신

 

이 글은 보리에서 펴내는 부모님 책 <개똥이네 집>

2011년 1월호 '돌모루댁 제철 밥상' 꼭지에 실린 글입니다.

 

 

오랜만에 가래떡을 빼러 마을 방앗간엘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한 해에 몇 번 안 가는 방앗간에 간 날이 마침 장날이다. 하루 전에 담근 떡살을 낑낑거리며 들고 방앗간에 들어서니 주욱 나래비를 섰다. 농사가 끝나고 김장철이 되면 집집마다 들깨며 참깨를 털어 와서 기름을 짜고 떡을 빼는 집들이 많다. 꼬부랑 할머님들이 자루 하나씩 들고 와 줄 서서 기름을 짜 간다. 고소한 들깨, 참깨 냄새가 길거리까지 퍼진다.

 

마침 떡을 빼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가자마자 떡살을 빻아 준단다. 방앗간 주인 할머니는 쌀을 기계에 넣으라 하고 주인 할아버지는 현미라 안 빻아진다며 넣지 말라고 한다. 두 분이 실랑이를 하는 사이 나는 눈치껏 쌀을 부어 버린다. 이제 워쩔껴? 나도 이젠 충청도 사람 다 되어 간다.

 

방아 기계 넉 대가 나란히 있는데 두 대는 쌀 빷는 거고 두 대는 고춧가루 빻는 기계다. 옆에서 매캐한 고춧가루 냄새가 나더니 느닷없이 재채기가 나온다. 쌀가루가 나오기 시작한다. "몇 시까지 오면 되죠?" "글씨... 금방 되여. 잠깐만 기둘려." "잠간 언제요? 1시간이요?" 이 잠깐이라는 시간이 내가 생각하는 시간과 여기 주인장이 무척이나 다를 거라 짐작한다. 내가 생각하는 잠깐은 그저 5분이나 10분인데, 여기 노인 분들은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일 게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은 정확하게 얘기해주지 않고 나보다 먼저 떡살을 빻아 놓은 함지를 가리키며 "저거 찔 때 위에 얹어 같이 찌면 되니께, 금시여, 금시. 쩌그 시장 한 바퀴 돌고 오면 될껴." 그러니까 방앗간 할머니가 말한 잠깐은 시장 구경 한 바퀴 돌고 온 시간인 것이다. 그러면 한 시간 남짓? 나는 그 새를 못 기다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한 시간 있다가 찾으러 갈 참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청소를 하고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만들고 예약 손님을 살펴보고 전화를 건다. 그 한 시간 동안 무슨 일을 그리 많이도 했는지. 떡도 남편이 찾아왔다.

 

점심밥 장사를 끝내고 찾아온 가래떡을 들쳐 본다. 김치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이 함지박에 한가득이다. 한 줄 쩌억 떼어서 맛을 본다. 서울에 살던 나는 방학이 되면 언제나 시골 외가에 갔다. 엄마는 입 하나라도 덜려는 생각이었는지 아님 내가 졸라서 가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외갓집으로 갈 때면 나는 늘 신바람이 났다. 연탄 공장을 하시던 할아버지는 읍내에서 몇 안 되는 부자 소리를 듣고 사셨다. 솜씨 좋은 할머니는 늘 맛난 먹을거리로 우릴 반겨 주셨다. 차멀미가 심했던 나는 서울서 버스를 타기 전에 멀미약을 먹는데 그 멀미약을 먹으면 바로 멀미를 시작했다. 속이 미식거리고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다. 그런 채로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시골 길을 달리다가 천안삼거리쯤 지나면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된다. 얼굴은 노랗게 질리고 거의 죽을 동 살 동이다. 엄마 무릎에 누워서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겨우 터미널에 내리면 바로 터미널 밖으로 달려 나온다. 밖으로 나와 공기를 쐬면 좀 살 것 같았다. 할머니 집은 읍내에서 택시로는 기본 거리지만 엄마는 그 택시비를 아끼려고 얼굴이 노란 나를 앞세워 걷게 했다. 그러면서 좀 걸으면 속이 편해진다고. 그런데 정말 거짓말같이 읍내 철길을 지나 논두렁 밭두렁을 걸을 때쯤이면 속이 가라앉았다. 작은 개울 외나무다리를 조심스레 건너면 바로 할머니네 울타리가 보이고 집 뒤 쪽문이 보인다. 엉성하게 잠긴 문에 손을 집어넣어 달팽이 같은 걸쇠를 풀고서 들어서면 텃밭이 보인다. 오른쪽 구석으로 돼지 우릿간이 있다. 시큼하고 쾌쾌한 돼지 냄새를 피해 얼른 뛰어가면 다시 뒷마당 쪽문이 나온다. 이 문은 늘 열려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서 큰 소리로 "할머니!" 부르면 "오냐, 우리 강아지들 왔냐." 하면서 부엌 쪽에서 흰 수건을 뒤집어쓴 할머니가 얼굴만 빼꼼 내미신다. 주걱이나 국자를 든 채로.

 

서울서 태어나 서울서 자란 나한테 고향이 있다면 외갓집일 것이다. 고향 냄새는 할머니가 정성껏 고아 준 조철 냄새다. 할머니는 방학 때마다 오는 손주들 주려고 가래떡을 뽑아 놓고 조청을 고셨다. 들큰하고 구수한 이 냄새.

 

또 멀미했냐? 물으시며 김칫국이나 동치미 국물 한 사발 떠 주신다. 이 김칫국 한 사발을 들이키면 갑자기 트림이 나오면서 속이 싹 가라앉는다. "조금만 기다려라, 할미가 밥 채려 줄껴." 하시며 밥 차리는 동안 먹으라고 금방 빼 온 가래떡과 조청을 내오신다. 아직도 뜨끈한 가래떡에 할머니가 밤새 고은 조청을 푹 찍어 입에 넣으면 어린 마음에도 "음, 좋아!" 하는 말과 함께 행복감이 밀려들곤 했다. 할머니 조청을 라면땅이나 샤브레 과자에는 없는 어떤 따스한 맛이 들어 있었다. 가래떡 하나를 다 먹기도 전에 할머니는 밥상을 한가득 차려 내오셨다. 동치미, 김장 김치, 총각김치에 생선을 굽고 멸치를 볶고 김을 구어 내셨다. 들기름 향이 가득한 김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밥을 다 먹으면 할머니는 다시 식혜와 다식과 약과를 한 아름 갖다 주시면서 더 먹으라고 하신다. 이미 떡에 밥에 배가 불렀지만 맛난 과자를 보니 자꾸만 손이 간다. 그래서 외갓집에 간 첫날은 어김없이 과식을 하게 된다. 불을 안 넣은 골방에는 할머니가 손주들 오면 주려고 만든 음식들로 그득했다. 들깨, 땅콩, 콩으로 만든 강정이 한 판씩, 약과와 다식들 식혜와 수정과, 조청까지. 안 먹어도 배가 브로고 마음이 든든하다.

 

가을에 캔 호박고구마가 늦은 가을비에 잘못 말렸는지 자꾸 썩는다. 오늘은 그 고구마를 몽땅 꺼내 먹을 만한 것들만 추려서 큰 솥에 다 쪘다. 한 김 나가면 도톰하게 썰어 채반에 펴서 바람 부는 옥상에 말렸다. 한 일주일 말리면 쫀득쫀득한 고구마 깸뺑이(고구마 말랭이)가 된다. 이걸 요즘 애들은 모를 거다. 어릴 때, 엄마도 가 버리고, 이모, 삼촌도 다 나가 버린 텅 빈 외갓집에서 서울 가즞 기차를 바라보며 하나씩 하나씩 씹어 먹던, 은근한 단맛이 나던 그 고구마 맛. 내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래 주던 고구마 깸뺑이.

 


돌모루댁 요리 수첩


♣ 고구마 말랭이

재료 물고구마(호박고구마) 1kg
만들기
1. 고구마는 깨끗이 씻어서 찐다.
2. 한 김 식으면 1센티미터 두께로 동글 썰기 한다.
3. 채반에 펴서 그늘지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서 일주일쯤 말린다.


♣ 호박고지

재료 늙은 호박 1통
만들기
1. 늙은 호박은 껍질을 깍는다.
2. 속에 든 씨를 잘 걷어 낸다.
3. 0.5센티미터 두께로 자른다.
4. 줄이나 채반에 펴서 말린다.

※ 정과나 떡을 만들 때 쓰거나 조려서 먹을 수 있다.

 

글쓴 이 윤혜신

 

마흔 살까지 도시에서 요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았다. 마흔 살 되던 해에 충남 당진 돌모루에 전원 식당 '미당'을 열고 여덟 해째 밥을 짓고 있다. 텃밭 농사를 짓고 꽃과 나무를 심고 가꾼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웹마스터 위희진

웹마스터 위희진 2011-02-11

IT업계에서 보리로 이직한 것은 생태적 개종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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