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5년 전 쯤인가, 일본에 간 적이 있어요.
대학 후배 가운데 재일동포 3세가 있었는데, 그 후배가 일본에서 함께 활동하는 평화단체에서 초청해줘서 난생 처음 바다를 건너가 보게 되었답니다. 일본 전국을 보름동안 돌아다니며, 평화운동하는 분들을 주로 만났는데,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킨지 얼마 안된 때라서, 파병반대운동(일본 자위대는 전쟁을 치를 수 없는 군대지만, 법을 교묘하게 피해 사실상 파병을 했답니다)을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도시를 가도 운동을 열심히 하는 분들 가운데 재일동포들이 빠짐없이 꼭 있었어요. 평화운동 하는 분들 가운데 재일동포들이 유독 많은 이유가 무언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평화운동 뿐만아니라 여러 진보개혁적인 사회운동에도 재일동포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고 해요. 아무래도 평생을 마이너리티로 차별받고 살아와서, 세상 문제에 민감하고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자기 일로 잘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일상생활에서 차별을 끊임없이 겪는 마이너리티-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들은 쉽게 서로 처지를 공감하고 연대하게 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빡빡한 일정 가운데 하루는 오사카 외곽에 있는 그 후배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방에서 뒹굴거리며 히라가나 가타가나 한 글자도 못 읽으면서, H2를 열심히 보고 있었죠. 그 후배 형이 갑자기 방에 들어왔습니다. 후배네 가족은 부모님과 형, 후배, 이렇게 4명인데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후배 하나 였어요. 후배의 형은 나랑 동갑인데, 호주로 유학갔다가 잠깐 일본에 와있는 거라 했어요. 수시로 얼굴을 마주치면서 인사도 안하던 형이 갑자기 방으로 들어오니 긴장할 수밖에요.
호주에서 유학할 정도로 영어가 유창한 형은 나에게 갑자기 여러 질문을 영어로 쏟아냈어요. "너희 남한 사람들은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알고는 있느냐?" "일본에 몇명이나 살고 있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느냐?" 이런 질문을 화난 얼굴로 거침없이 토해냈습니다. 저는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어요. 짧은 영어때문이 아니라, 정말 몰랐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습니다. 평화운동 한답시고 일본 평화단체에서 초청받아서 왔다고 우쭐댔지만, 이라크에 견주면 아주 지척에 있는 재일동포들에 대해서 이렇게 모르고 있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던거죠.
나중에 서경식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영화 '박치기'를 보면서, 재일조선인을 알아갈 때마다 후배 형의 화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체류기>가 나왔어요. 평화발자국 일곱 번째 책이예요. 이번에도 만화책입니다.
<내가 살던 용산><나는 공산주의자다>에 이어 세 번째 만화책이네요.
이 책이 재일조선인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지는 않습니다.
전에 서경식 선생님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영화 '박치기'를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해요. 재일조선인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모든 재일조선인의 삶을 마치 영화에 묘사된 모양이 전부인 양 받아들일까봐 그렇다 해요. 서경식 선생님은 영화 '박치기'의 배경인 1960년대 후반 교토에서 영화 주인공들과 비슷한 또래로 살았지만, 영화에 그려진 재일조선인들의 모습과 선생님 가족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고 해요. 영화에 나온 모습이 모든 재일조선인을 보여줄 순 없는 거지요.
이 책 역시도 영화 '박기치'와 마찬가지로 모든 재일조선인의 삶을 보여주지는 않아요. 이 책은 우리학교를 나오고, 조선적을 지키는, 민족의식이 남달리 강한 '리정애' 이야기를 아주 쉽게 재밌게 풀어가고 있어요. 저렇게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 이야기까지 담아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 이야기는 충분히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을 보고 재일조선인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이 책을 보고, 리정애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재일동포를 알아가는 첫걸음을 내딛는 데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재일동포에 대해 아주 모르는 분들이나, 조금 알고 있는 분들에게는 재일조선인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친절한 책이고, 재일동포에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는 분들에게는 '리정애'와 같이 민족성을 지켜려 애쓰며 살아가는 재일동포들 이야기에더 깊숙히 다가갈 수 있는 책입니다.
아래는 이 책 만화가 임소희 작가가 블로그(
http://blog.naver.com/takethepower)에 올린 직접 쓴 소개글의 일부예요
눈물많고 정많고 공주병도 살짝 있는(본인은 전주 리씨라 공주'병'이 아니라 진짜 '공주'라고 합니다만.ㅋ)
재일조선인3세 리정애가 남똑을 오가며 겪은 특별한 이야기와
우리가 알아야할, 하지만 모르고 있는 재일조선인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을 보다보면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일조선인 여성의 관점을 빌려 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발견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만화를 만들 때 때로는 내 작업을 한다,는 느낌보다
재일조선인에 대해, 우리 사회에 대해 알려야할 반드시 제출해야하는 리포트를 만들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조국과 민족, 통일 같은 무겁고 거창한 명제들보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있으며
마음을 나누려고 하고 있는지, 아주 최소한, 서로에게 예의를 지킬 수 있는 정도의 이해는 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책이라는 걸 떠나서 많이들 보시고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 진짜 제 책이라서 그랬으면 하는게 아니랑게요.^^;;
관련기사 보기
한겨레 조선-남한 ‘1호부부’ “함께 살게 해주세요”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43076.html
서울신문 “민족성 지키는 재일조선인 이해를”-‘서울 체류기’ 펴낸 조선적 재일동포 3세 리정애 씨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1013027021
국민일보 한국인과 결혼 ‘무국적자’ 리정애씨의 간절한 호소 “왜 저는 이 땅에서 살 수 없나요”
http://news2.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219305&cp=nv
통일뉴스
조선 처녀와 대한민국 청년은 어떻게 만났을까
1. 조선적 처녀 리정애 이야기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862
2. 대한민국 청년 김익 이야기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880
혼례식 기사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2139
제주의 소리 재일제주인 3세 리정애의 '한국-일본-북한' 넘나들기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89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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