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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마주 이야기" 갈래 글122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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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비가 옵니다.
여러분의 행렬에 먼지 일지 말라고
실비 내려 보슬보슬 길바닥을 축여 줍니다.
비바람 속에서 자라난 이 땅의 자손들이라
일 년에 한 번 나들이에도 깃이 젖습니다그려.
여러분은 어머님께서 새 옷감을 매만지실 때,
물을 뿜어 주름을 펴는 것을 보셨겠지요?
그것처럼 몇 번만 더 빗발이 뿌리고 지나만 가면,
이 강산의 주름살도 비단같이 펴진답니다.
시들은 풀잎만 엉클어진 벌판에도 봄이 오면
하늘로 뻗어 오르는 파란 싹을 보셨겠지요?
당신네 팔다리에도 그 싹처럼 물이 올라서
천둥 치듯 비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말라고 비가 옵니다.
높이 든 깃발이 그 비에 젖습니다.

윤석중, 《어린이와 한평생》, 범양사, 111쪽

1929년 어린이날에 심훈이 쓴 축시다. 1923년에 시작했으니 7회째인데, 어린이날이면 해마다 비가 왔다고 한다. 정말 비가 왔나?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1926년 어린이날 행사 때 연동교회 유치부 어린이들이 단체로 참석했는데, 그 가운데 정병호 교수 어머니도 있었다.  

“그날 선생님을 따라서 동대문 쪽으로 가는데 말 탄 순경들이 행렬을 해산시키고, 깃발을 든 사람들을 잡아가서 우리끼리 울면서 집으로 왔어. 거기서 연동까지 걸어오는데 해는 뜨겁고 먼지가 펄펄 나고, 힘들었어. 집에 오니까 아버지하고 집안 어른들이 마루에서 방정환이 잡혀갔다고 걱정들을 해.”

이런 증언을 보더라도 해마다 비가 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시에서 심훈이 비가 왔다고 하는 것은 은유다. 앞부분에서는 어머니가 뿜는 물이 옷깃 주름살을 펴듯 어린이날이 이 강산을 비단같이 펴 주는 보슬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타난다. 그리고 뒷부분은 어른들이 저마다 깃발을 치켜들고 천둥 치듯 시끄럽게 싸워도 어린이들이 보슬비가 되어 그 깃발에 생긴 주름을 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려 한다.

1925년 정홍교가 이끌던 무산자소년운동단체인 반도소년회가 불교소년회와 손을 잡고 기독교와 천도교 소년회 단체 몇을 모아 경성소년총동맹을 만든다. 그러나 일제가 그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해서 5월회로 바꾼다. 초기에는 5월회에 방정환이 참여했는데, 얼마 안 돼 정홍교가 주도권을 잡고 김기전과 방정환이 이끌던 소년운동협회에서 떨어져 나온다. 이 때문에 1926년과 1927년에는 어린이날 기념식을 따로 나눠서 하게 된다. 1927년 그때 신문 기사를 보면 소년운동협회 쪽은 오후 한 시부터 천도교기념관에서 이백 개 넘는 단체가 모여, 5월회 쪽은 시천교당에 오십 개 넘는 단체가 모여 기념식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중앙이라는 서울에서만 이렇게 따로따로 기념식을 한 것이고, 전국 곳곳에서는 서로 나뉘지 않고 성대하게 어린이날 행사를 치러 냈다. 온 나라에서 50만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처럼 중앙 단체가 서로 갈라지는데도 지역 단체가 따르지 않고 이를 비판하자 중앙 단체는 다시 방정환을 의장으로 한 조선소년연합회로 뭉치게 된다. 그러나 5월회 쪽은 무산자소년운동에 힘을 쏟아야 한다면서 방정환을 강력하게 비판했고, 1929년에는 또다시 나뉘어 어린이날 행사를 한다. 심훈은 어린이 운동이 이런 현실을 이겨 내기를 바랐던 것이다.

무산자소년운동인 5월회는 농어촌 야학과 도시 노동 야학에 힘을 쏟는다. 김기전과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어린이 문화 운동을 ‘쌀밥 먹는 아이들을 위한 운동’이라고 비판하면서, 낮에는 노동을 해야 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밤에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자는 운동이다. 1930년대 온 나라에 야학 운동이 불붙을 수 있었던 까닭은 5월회가 1930년대 조선 소년 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아래 노래는 야학 운동가다.


옷밥에 굶주린 동무야
눈조차 멀어서 산다냐
낮에 못 가는 학교를
한탄만 하면 뭐하나
낮에 못 배운 동무야
가난에 쫓긴 동무야
밤에 만나서 배우자

김정의, 《한국소년운동사》, 민족문화사, 223쪽

그때 어린이 운동이 이처럼 색동회와 방정환을 물리치고 5월회와 정홍교 중심으로 바뀐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색동회와 방정환은 쌀밥 먹는 아이들만 위하고 5월회와 정홍교는 밥도 못 먹는 아이들만 위하였나? 그럴 수는 없다. 제1회 어린이날 선언을 보면 방정환과 김기전은 어린이를 경제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점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다. 5월회도 제1회 어린이날 선언문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런데도 어린이 운동이 이처럼 날카롭게 갈라진 것은 그때 조선 지도층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사회주의가 주도권을 잡는 과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정홍교 쪽이 이끈 야학 운동은 옳다고 본다. 그렇지만 방정환 쪽을 부자 부모를 둔 어린이들을 위한 운동이나 감상주의로 몰아붙인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방정환은 총독부와 이광수 쪽이 밀고 나가던 조선교육칙령에 따른 황국신민화 노예교육에 반대해, 어린이들이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학교 밖 소년회를 조직해서 문화 활동을 하며 어린이 해방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1920년대 이러한 소년회 활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1930년대 야학 운동이 활발해질 수 있었다. 잘 살펴보면 야학은 문화 중심이었던 소년회 활동을 공부 중심으로 바꾼 것이다. 그렇다고 방정환이 주장했던 문화 활동을 안 한 게 아니라 거의 다 그대로 하면서 학과 공부를 더한 것이다. 따라서 이념보다 먼저 어린이를 참으로 생각했다면 정홍교 쪽이 방정환이 일구어 놓은 자리를 인정해 주면서 어린이 운동 가운데 한 갈래로 야학 운동을 펼쳐 나가야 했던 것이다. 1930년대 어린이 운동이 갈라지면서 어린이들을 갈라 세우고 증오심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20년 뒤에 일어난 동족상잔 비극을 막거나 그나마 작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또 하나 5월회 쪽이 잘못한 것은 시천교와 손을 잡고 시천교당에서 주된 행사를 했다는 것이다. 시천교는 알다시피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수제자인 이용구가 세워서 송병준이 만든 일진회하고 같이 친일, 매국 활동을 하고 있었다. 많은 동학교인을 친일 앞잡이로 만들었다. 이에 반대하는 동학교인을 모아서 손병희가 세운 종교가 천도교다. 손병희는 동학에서 이용구보다 서열이 낮았고, 시천교에서 갈라져 나와 홀로서기 한 것이다. 따라서 그때는 천도교보다 시천교가 훨씬 큰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런 시천교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5월회나 정홍교 사상이나 그 뒤 활동과 어긋난다. 아마도 천도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방정환에 맞서기 위한 전술이었던 것 같다. 그때 시천교와 천도교는 둘 다 동학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지만, 시천교는 반민족 친일로 가는 길을 걸었고, 천도교는 민족 해방으로 가는 길을 걸었기 때문에 지역에서까지 서로 미워하고 있었다. 그런 시천교와 손을 잡는 모습을 보여 천도교와 방정환으로 시작된 어린이 운동에서 주도권을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겨레와 어린이를 생각한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린이 운동은 지금까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어떤 이념 하나에 매이면 안 된다. 참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지구촌 생명 해방, 인간 해방, 어린이 해방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가 따져서 해야 한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만드는 평화, 지구촌 생명체들이 함께 사는 평화를 위하는 길만이 어린이 운동이 나갈 길이다.

글쓴이 | 이주영
서울 마포초등학교 교감, 경민대 독서문화컨텐츠학과 강사를 맡고 있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계간 <어린이문학>을 펴내고 있다.


보리출판사에서 펴내는
부모와 어른을 위한 책 <개똥이네 집> 2010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보리

보리 2010-09-06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수익이 나면 다시 책과 교육에 되돌리자. 보리출판사의 출판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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