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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란

보리출판사에서 스무 해 남짓 편집자로 일해 왔다.
한곳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책임이 점점 커져 걱정도 많아진다.
한때 극단 이곳저곳으르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그 뒤로도 가슴 한편에 배우고 되고 싶은 꿈을 못 버리고 살다가
영화 <시> 덕분에 소원 풀이를 했다.


아마 그런 기억이 누구나 한두 번쯤 있지 않을까. 새 학년에 올라가 새 교과서를 받아 들면, 재미있는 단원이 있나 없나, 어디쯤 실려 있나 하면서 교과서를 살펴보던 일. 나는 그때마다 맨 먼저 국어 교과서를 펼쳐 들고 희곡이나 각본 따위를 훑어보면서, 그 단원 수업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게 해마다 국어 교과서를 뒤적였고,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으며, 편집자로 일을 한 지는 어느새 스무 해가 넘었다.

그런 내가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그 영화가 칸 영화제까지 나갔고, 각본상을 받았다. 그렇다. 내가 오랫동안 품고 있고,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을 이뤄 준 영화가 바로 이창동 감독이 만든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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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물론 단역이다. 맡은 역은 '시 강좌 여수강생 3'이다. 그런데도 둘레 사람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져 궁금하던 사람들한테까지 전화를 받았다. 어쩌다 영화를 찍게 됐는지, 어떻게 영화를 찍었는지 많이 물어 온다. 나도 퍽 신기하고 마치 영화 같기도 하다.

지난해 회사를 잠시 쉬던 때에 이창동 감독이 찍을 새 영화 <시, Poetry>에 나올 배우를 뽑는다는 글을 보았다. 조건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외모를 지닌 분'이면 된다고 했다. 단박에 자기 소개서와 집 가까이에 있는 공원에서 후다닥 찍은 사진을 보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서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구나.' 생각하던 즈음에 첫 심사를 받으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뛸 듯이 기뻤다.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심사를 받았는데, 두 번째 심사에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이 언제냐는 물음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내가 답한 이야기가 담긴 시나리오를 받았고, '시 강좌 여수강생 3'이라는 배역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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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추석 연휴 동안 강원도 영월에서 찍었다. 여주인공과 함께 시 강좌를 듣는 장면들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궁금하고 신기한 것 투성이였다. 조명, 촬영, 음향, 의상, 분장, 제작, 연출부가 짜임새 있게 꾸려져, 매우 질서 있게 움직였다.

촬영 전날에는 단역 배우들 의상과 소품을 미리 챙겼다. 늘 입고 있던 옷을 챙겨 오라고 했고, 장면에 맞춰 옷이나 신을 골라 줬다. 나는 회사에서 만든 가방과 수첩 따위를 소품으로 가져갔는데 막상 화면에서는 드러나지 않아 아쉬웠다. 분장도 보통 때처럼 자연스럽게 했다.

기다림 끝에 촬영이 시작했다. 여럿이 함께 나오는 장면부터 찍었는데 똑같은 장면을 되풀이해서 찍었다. 여럿이 함꼐 나오는 장면부터 찍었는데 똑같은 장면을 되풀이해서 찍었다. 알고 보니 반응 장면을 찍는 거였다. 이를테면 선생님이 강연을 하는 장면과 강의를 듣는 학생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오가도록 하는 거다. 그리고 내 단독 장면을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 대사가 두 군데나 빠져 있었다.

영화는 늦여름부터 초겨울까지 찍었다고 한다. 영화 촬영이 끝나고 되풀이 자리에 갔는데 "나는 당신들을 알지만 당신들은 나를 모르지." 하면서 말을 건넨 분이 있었다. 알고 보니 이름난 영화 편집자였다. 그러니까 내 대사를 자르고 붙이고 하시는 분이다. 마침내 시사회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다가도 얼마나 잘렸을까 불안에 떨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영화가 끝난 뒤 올라가는 자막에서 내 이름을 보고 신랑이 한마디 했다.

"가문에 영광이야."

영화는 시사회 때 보고, 개봉하고 나서 회사 동료들과 우르르 몰려가 한 번 더 보았다. 시사회 때는 긴장이 되어서인지 놓친 장면이 많았다. 다시 보니 가슴이 울컥하는 장면이 여럿 있었고, 참 좋은 영화이고, 그런 영화에 배우로 나왔다느 사실이 뿌듯했다. 영화를 보고 아는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다. 교사들이 많이 보면 좋겠다고, 교육 영화로 여겨진다고 하신다. 사촌 동생도 아이들한테 퍽 좋은 선물을 했다고 전화 문자를 보내왔다.

영화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미자는 작은 도시에서 이혼한 딸이 맡긴 중학생 손자를 키우며 사는 할머니다. 중풍이 든 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는데, 자신도 치매 초기 증세가 있다. 미자는 그런 팍팍한 현실을 떠나 '아름다운 시'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세상은 미자한테 '부도덕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시를 사랑한다면서 음담패설을 일삼는 사람이 있고, 미자 손자와 손자 동무들이 사람을 죽게 만든 커다란 잘못을 어른들이 쉬쉬하면서 돈으로 해결한다. 미자는 '아름다운 시' 세계와 '부조리하나 세상'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나 마침내 '시'는 아름다운 것을 봤을 때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더 나은 길을 찾아갈 때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손자와 손자 동무들 때문에 죽음에 이른 한 사람을 위로하는 시를 완성한다.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책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어떤 영화 또는 어떤 책을 만들까 기획하고, 글을 쓰고, 알맞은 배우 또는 화가를 고르고, 만들고, 널리 알리고.

<시>는 아름다움이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저마다 그 질문에 답하게 하는 영화다. 나는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두고두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시>는 나한테 좋은 책을 만드는 기준 가운데 책에 중심이 되는 메시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을 다시금 던지게 했다.



보리에서 펴내는 월간 부모님 책 <개똥이네 집> 2010년 7월호 '영화를 보니'

보리

보리 2010-06-24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수익이 나면 다시 책과 교육에 되돌리자. 보리출판사의 출판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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