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우 아저씨가 변산 공동체에 놀러왔던 때가 기억나.
그냥 놀러온 거야. 맨몸으로. 소중한 손님이 왔는데 막걸리 마시고 우리끼리만 논다는 게 좀 그래. 그래서 둘레에 있는 마을 어른들과 아이들을 불렀지. 그리고 백창우 아저씨에게 막무가내로 노래 부르라고 졸라댔어.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 변변한 무대 장치도 없고, 찾아보니 줄도 제대로 골라지지 않은 싸구려 기타가 어디서 나오기는 했는데 그 기타에 끈도 없는 거야. 그래도 어떻게 해. 막 기타를 떠안기면서 노래하라고 했지. 둘러앉은 애와 어른들 부추겨서 손뼉 여러 차례 치게 하고...
이런 일은 처음 겪는가 봐.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고 손사래를 치더니, 기대하는 눈빛이 너무 간절하니까 주섬주섬 줄을 고르고 튕기고, 어깨에 맬 끈을 두리번두리번 찾아. 그런 게 어디 있어. 없지. 그래서 내가 얼른 새끼 토막 하나 주워 와서 내밀었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나를 뻔히 쳐다보더니, 히죽 웃으면서 새끼줄을 기타에 매고 그걸 어깨에 걸쳤어. 그렇게 해서 즉석 음악회가 열렸는데, 밝고 명랑한 노래는 다 어디 갔는지, 입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가 칙칙하고 슬퍼.
'어, 이래서는 안 되는데. 분위기 확 깨는데' 생각하고 어쩔 줄 몰라하면서 아이들 표정을 유심히 살폈어. 그런데, 어라! 그렇게 강당이 좁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엉머구리 끓듯 하던 애들이 삽시간에 얌전해지더니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거야. 내 귀에는 영 그저 그렇게 들리는 <백창우 노래 마을>에 실려 있던 어둡고 서러운 소리들이 아이들 귓전을 때리자마자 그 노래에 깊이깊이 빠져드는 걸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어.
나중에야 무릎을 쳤어. 그래 아이들이 반드시 밝고 명랑한 노래만 좋아한다는 건 어른들 지레짐작에 지나지 않구나, 아이들은 슬픈 노래도, 어둡고 단조로운 목소리도 거기에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만 실리면 단박에 그 가락에 넋과 몸을 실어버리는구나, 백창우 아저씨가 우리 아이들 마음을 이렇게 깊이 헤아리고,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니까 아이들이 백창우 아저씨 노래에 이렇게 하염없이 빠져드는구나, 하는 일깨움이 이 할아버지 가슴을 쳤어.
백창우 아저씨가 우리아이들을 마음에 두고 작곡한 곡이 아마 천개가 넘을걸. 어디에 그 많은 노래가 숨어 있느냐고? 할아버지도 궁금해. 그렇지만 짐작은 하지. 사랑으로 가득 찬 아저씨의 따뜻한 가슴속에서 마치 샘물처럼 그 노래들이 솟아오른다고 말이야.
이번에 백창우 아저씨 가슴속에서 우리 어린이들에게 바치는 맑은 노래들이 한꺼번에 샘솟았어. 물론 어느 한 순간에 솟아오른 건 아니야. 오래오래 깊이깊이 숨어 있던 사랑의 물줄기가 햇살 아래 단박에 분수처럼 솟구친 거지. 이 세상에서 우리 어린이들을 누구보다 더 깊이 사랑하셨던 이오덕 할아버지, 권정생 할아버지, 임길택 아저씨 동시에 실려서 말이야. 그리고 이 분들이 가르치신 어린이들이 쓴 시들을 타고 말이야. 이 할아버지는 지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기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
슬프고 주눅이 들어있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한꺼번에 이렇게 큰 선물을 안긴 사람이 여지껏 한 분도 안 계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
이 노래를 들으면 여러분들도 마음에 사랑의 샘물이 고여 오르는걸 느낄 거야. 이 노래들이 기쁘르 때도 슬플 때도 우리 어린이들에게 좋은 길동무가 되기 바래.
음반이 나오자 세 선생님들이 되살아난 것 같다고
아이처럼 좋아하신 윤구병 선생님
이오덕 선생님은
1925년 경상북도 청송에서 태어나서 2003년에 돌아가셨습니다. 40년 넘게 주로 농촌 학교에서 글쓰기를 중심으로 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했습니다.
퇴직한 뒤로는 글쓰기 교육과 어린이 문학, 우리말 살리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권정샌 선생님은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된 이듬해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온몸이 결핵에 걸려 평생 아픈 몸으로 살면서
이 세상 가장 낮은 곳 이야기들을 동화로 그렸습니다. 경상북도 안동 조탑동 빌뱅이 언덕 아래에 조그만 흙집을 짓고, 2007년
5월 돌아가실 때까지 혼자 살았습니다.
인세는 북녘 어린이들과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임길택 선생님은
1952년 전라남도 무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76년부터 가난한 탄광마을과 산골마을에서 열네 해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고 1990년부터는 경상남도 거창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1997년 4월에 폐암 선고를 받고 요양하다가 그해 12월 11일에 마흔여섯 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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