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편집자인 저로서는 편집자의 역할이 뭔지 여전히 막연하지만, 편집자여서 참 좋다고 느낀 순간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첫 책 《
내가 살던 용산》을 읽고 어떤 편집자가 쓴 서평에서 “이 책의 편집자가 부럽다.”고 했을 때 그랬고, 완성된 책을 보고 작가가 뿌듯한 표정을 지을 때 그랬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편집자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뛰어난 작가를 만나 함께 책을 만들어 갈 때가 아닐까요?
입사하고 얼마 안되었을 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책인데 제가 맡아서 하게 될 거라며 만화 원고를 한 무더기 받았습니다. 원고를 처음 받았을 때 “이런 만화도 다 있구나.”하고 살짝 낯설었습니다. 묵직하고 투박하고 마치 판화처럼 보이는 표현기법도 낯설었고, 담겨 있는 주제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지요. 쉽게 읽어내려 가기는 분명 힘들어 보여, 작가에게 좀 더 다가서기 위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봤습니다.
그렇게 박건웅 작가의 만화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혼자만 보기엔 아까운 박건웅 작가의 만화들을 살짝 소개해 드릴게요. 먼저 맨
처음 그린 《
꽃》. 어렸을 때 재미있게 봤던 TV드라마 ‘
여명의 눈동자’가 생각나기도 하고, 조정래의 《
태백산맥》이 생각나기도
하는 작품입니다. 이쯤 되면 대충 눈치 채셨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지리산 골짜기 마다 서려있을 역사와 죽음, 그것들의 주인인
빨치산 이야기입니다. 모두 4권이라 한꺼번에 사보기에는 살짝 부담스럽지만^^ 다행히 저는 회사에 이 책이 있어서 마음 놓고
봤어요. 그리고 《
홍이 이야기》. 며칠 전 4월 3일 이었지요. 《
홍이 이야기》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 4․3을 그린
만화입니다. 또 다른 박건웅 작가의 역작 《
노근리 이야기》는 한국 전쟁 중에 일어났던 비극(비극 참 많네요ㅠㅠ) 노근리 민간인
학살을 그린 만화입니다.
얼마 전에 영화 ‘
작은 연못’도 개봉했죠. 아는 사람은 알고 있지만 아직 모르는 사람이 더 많고, 숨겨진
진실도 많이 있는데, 영화든 만화든 이런 작업이 계속되어 진실을 밝혀내는 것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도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곧 있으면 2권도 나온다고 하니 마구 기다려집니다.
박건웅 작가는 이처럼 한국 현대사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 편에서 서술한 역사책에서 왜곡되거나 의도적으로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묵묵히 진행하는 멋진 작가입니다. 제가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많아서 유난히 좋게 보는 거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위
작품들을 보면 여러분들도 제 의견에 동의 하실 겁니다. 만화책마다 그림체가 다 달라요. 작품을 할 때마다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그림체를 고민하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노력도 엿보이구요. 이렇게 뚜렷한
철학과 작가의식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틀을 깨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작가와 일을 하는 건 편집자에겐 굉장히 좋은 경험이
되고, 이 작품을 손에 드는 독자들에겐 커다란 즐거움이 될 겁니다.
슬램덩크처럼 재미있지도 않고
H2처럼 순식간에 몇 번을 읽게 되지는 않지만, 박건웅 작가의 만화는 어떤 만화도 가지지 못한 힘이
느껴집니다. 이번에 나오는 《나는 공산주의자다》도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편집자가 자기 책 자랑하는 게 팔불출인 거, 저도
알아요. 그래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책 나오면 여러분도 아실 거예요. 제가 왜 이렇게 박건웅 작가의 극찬을 손발 오그라들
게 늘어놓는지. 대한민국에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고, 이 작가와 함께 책을 만들고 있다는 게 참 고맙습니다.
추신> 박건웅 작가 같은 만화가인 박소림 작가와 4월 11일에 결혼합니다! 축하해주세요~^^
편집살림꾼 이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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