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을 맞아 보리출판사 22년 역사를 돌이켜 봅니다.
보리는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보릿고개를 넘는 많은 이들에게
보리밥으로나마 목숨을 이어가게 하는 고마운 낟알입니다.
‘보리’에는 다른 뜻도 있습니다.
널리 이롭게 한다는 한자 말 ‘보리(普利)’로도 풀이되고,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普提 下化衆生)이라는 불교 용어에서 말하는
’깨우침‘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늘 보리출판사는 책 한 권 한 권 펴낼 때마다
‘이 책이 나무 한 그루를 베어 낼 가치가 있는지’ 고민해 왔습니다.
나무와 사람은 목숨을 주고받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목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바람’을 우리는 ‘목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내쉬는 ‘날숨’에 섞여 있는 이산화탄소를 나무가 ‘들숨’으로 받아들여 자라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무가 내쉬는 숨에 섞여 있는 산소를 우리가 ‘들숨’으로 받아들여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사람과 나무는 목숨을 주고받는 사이고, 목숨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이 세상에 나무가 없다면 우리도 살 길이 막힙니다.
그러니 나무 한 그루 베어 내 만든 책이 읽는 이에게
나무 두 그루를 심을 마음을 내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만 목숨을 없애는 데 지나지 않고 우리 목숨마저 거는 셈입니다.
나무 목숨도 지키고 우리 목숨도 지키자는 뜻으로
여느 출판사가 책 열 권을 만드는 사이에
정성 들여 한 권 만드는 데 그쳤던 보리출판사가
요즘 들어 한겨울 모진 추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보리는 눈이 많이 내린 뒤에 날씨가 추워지면
뿌리가 서릿발에 들떠 얼어붙습니다. 그러면 살아남기 힘들지요.
그래서 농사꾼들은 한겨울 추위에 ‘보리 밟기’를 합니다.
들뜬 뿌리를 가라앉히려고요.
출판 환경이 바뀌어 동네 책방도 어린이 전문 서점도 하루가 다르게 문을 닫고,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출판사들은 빨리빨리 책을 만들어 이 ‘서점(?)’들에 헐값으로 책을 넘겨야
비좁은 매대나 책꽂이 한 모퉁이나마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리 책은 헐값에 낼 수 없습니다.
<보리 국어사전> 한 권을 만드는 데 7년 반이 걸렸습니다.
들인 돈도 20억 원이 넘습니다.
<어린이 세밀화 도감>들을 엮는 데도
한 권 내는 비용이 4억 원 안팎, 제작 기간이 5년 남짓 걸렸습니다.
이렇게 더디더디 책을 내는 출판사가
어떻게 도매상이나 대형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에 눅은 값으로 책을 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정으로 보리 책은,
지금껏 꾸준히 내고 있는데도 어디에도 쉽사리 눈에 띄지 않습니다.
동네 책방이 되살아나고 어린이 전문 서점이 다시 문을 열어야,
그리고 책이 정가대로 팔려야,
보리 같은 뜻있는 출판사가 살아남을 길이 열립니다.
정가판매제는 길게 보아 가까운 동네 책방에서
제 눈으로 책을 보고 좋은 책만 고르는 독자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한겨울 보리 밟기에 일손을 빌려 주십시오.
-윤구병, <개똥이네집> 2012년 1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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