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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람의 자식’으로

 다시 ‘자연의 자식’으로
농부 철학가에게 교육을 듣다

 

윤구병
서울대 철학과 졸업. 충북대 철학과 교수. 월간<뿌리깊은 나무> 편집장.
변산 공동체학교 창립, 현 대표. <보리 출판사> 대표.

 

한국 사회에서 가장 확실한 신분 보장과 명예 권력을 지닌 신분 중 하나라 할 ‘교수’자리를 스스로 버렸다. 졸업장 외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 질문과 토론이 없는 강의실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손과 발과 땀으로 배우는’ 변산공동체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그에게 교육과 오늘날의 대학은 무엇일까. 교육의 궁극 목표는 첫째, 스스로 앞가림을 하게 하는 것, 둘째, 서로 도와서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라며 나머지는 모두 ‘지엽말단’일 뿐이란다. 과격하고 이상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거대하게 관성화된 이 시대의 모습에 “지배, 제도, 기구들에 부림을 받는 이가 지식인”이라는 그의 지적은 간단없이 아프게 들려왔고, 그만큼 우리 사회는 거기서 ‘발전’의 영감을 받고 싶어 했다. ‘간암과 동행’ 중이면서도 인터뷰에 응해 준 윤 선생은 자신의 삶을 말할 땐 겸양 속에서도 강고했으나, 사회를 말할 땐 뼛속 깊이 아파하는 모습이 비쳤다 .

 

 

Q. 대학 교수 자리를 내려놓은 후의 대학교육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요?
A. 좋은 직업이자 직장이라 했던 곳을 제 발로 나온다 하니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 일색이었지요. 하지만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절실한 질문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게 점점 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가슴 속에 품은 절실한 질문들이 있는데, 강의실에서 그것을 풀어놓지 못했습니다. 절실한 질문은 없고, 그저 질문 없는 대답, 대답 없는 질문만 평행선을 그어 가며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거의 대다수 학생들에게 대학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교육기관은 아닙니다. 나날의 삶에 실제로 필요한 지혜와 현실생활에 유용한 정보는 대학에서 배울 수 없습니다. 도리어 이런 공부는 당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현실 생활 속에서 이뤄집니다. 작업장이나 일터에서 땀 흘려 일하면서 삶의 보람을 찾으려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을 때, 비로소 참 공부는 시작됩니다. 이 말은 농사꾼으로 살아오면서 내가 배운 것이, 교수로서 책상 앞에 앉아 얻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음을 느끼기에 스스럼없이 하는 말입니다.

 

Q. 학생과 교수에게 구체적 조언을 해주십시오.
A. 교수들에게는 ‘가르치려 들지 마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15년 대학생활 중 절반 정도는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5명~7명을 동아리처럼 묶어서 고대, 중세 철학사 별 과제를 줬지요.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에 대해 조별로 읽고 토론하고 발표하고 녹취록과 리포트를 내라는 겁니다.
자유롭게 시킨 것 같지만 일정한 목표를 위해 까다롭게 성적을 매겼지요. 그 일환 중 하나가 개인별 성적이 아닌 팀별 성적의 고수입니다. 그렇게 저희들끼리 모여서 공부하게 하고, 큰 물줄기를 잡아주고, 전혀 엉뚱한 결론이 나오지 않게만 해주는 겁니다. 당시 서울대 철학과와 충북대 철학과의 입학 성적 차이는 100여점이 족히 넘었습니다만, 시쳇말로 ‘서울대생 저리가라’급은 되었다 봅니다. 굉장히 넓혔다가, 깊이 보는 눈은 월등해 졌다고 지금도 자부합니다. 한마디로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싶어요. 교수님들끼리 동아리를 먼저 만들고 학생들에게 전파하는 식을 권합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제일 부족하다 싶은 건 '귀담아 듣는 일'이라고 봅니다. 토의·토론형 공부는 말을 주고 받는 것이며, 이것은 사실상 도움을 주고 받는 의미입니다. 그러려면 듣기 훈련이 돼있어야 해요. ‘①듣기→②말하기→③읽기→④쓰기’의 공부를 익혔으면 합니다.
젊은이들은 무엇보다 손과 발로 땀 흘리고 몸으로 아는 공부를 하길 바랍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농활'이다 뭐다 해서 농촌에 많이 내려 왔습니다. 그런데 2005년 이후로는 그런 학생들을 보지 못해요. 농촌에서 내 손과 발, 땀으로 하는 공부를 경험해봤으면 합니다. 이는 흙, 바람, 햇빛, 비, 유기물과 무기물 등 전체 자연이 참여하는 공부인 것입니다 .

 

Q. ‘변산공동체’에는 선생님의 교육 철학 중심이라는 ‘자율성’이 있지요. 그것을 바탕으로 일구신 곳에서 어떤 식의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요?
A. 변산공동체는 처음부터 ‘변산공동체학교’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저는 삶터와 일터가 동떨어지고, 배움터마저 삶터와 일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근대식 제도 교육이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고 보았기에 변산공동체를 일구었습니다. 저 자신이 그동안 스스로 앞가림하고, 서로 도우며 사는 참공부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에 공동체학교의 '학생'이라 여기고 시작했지요. 아이들을 가르쳐달라는 주민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거절하다 못 이겨 마침내 그 일도 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여자가 자식 공부에 뜻을 세우면 못 막습니다. 실험학교를 현실학교로 막무가내로 오해해요.
변산공동체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 강요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머리 굴리는' 시간은 하루에 3시간 정도로 국어와 역사만 필수고 나머지 과목은 자발적 공부입니다. 목공과 도예, 천연염색과 탈춤 등도 배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을 '놀면서 배우게' 합니다. 거기서 손과 발, 몸을 놀립니다. 손과 발을 놀게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열심히 일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으로부터의 공부, 스스로의 공부, 자기 앞가림과 도움 주고 받는 길을 체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물질 자원이라는 측면에서는 가난할지 몰라도 생명 자원은 그 어느 나라보다 풍부합니다. 3면이 바다에다 갯벌이 있어 다양한 생물이 살고 산지가 70%임에도 땅이 비옥해 자급자족이 가능하니까요. 이걸 아이들이 배워야 하고, 살림꾼을 길러 먹고 사는 것만이 큰 살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시사회는 저마다 통제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위계질서의 공간이죠. “자율성”이라는 것은 생명의 시간과 공간에서 여러 생명체와 ‘스스로 함께’ 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강아지풀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싹틔우고, 꽃 피우며, 열매 맺고, 그 열매나 씨앗으로 베풀고, 죽을 때 알아서 죽고 땅에 묻힙니다. 결국 스스로 하는, 자연으로부터의 공부가 자율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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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정한 답 맞추기만 한 아이들
교육이 본능보다 못해 참사 맞아
먼저 교수들끼리 토론 나서고,
학생들끼리의 토론 수업 유도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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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농사일을 시작 하시면서 얻은 깨달음이신가요? 언젠가 윤봉길 의사의 <농민독본>을 인용하시며 ‘농촌은 인류의 생명창고’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만…
A. 농사일을 배우면서 적어도 나는 쓸모없는 지식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벼락치기로 밤샘을 하여 달달 외웠다가 시험이 끝나면 온 데 간 데 없이 머리에서 사라지고 마는 그런 공부는 하지 않아요. 배워 익히는 것은 모두 스스로의 삶에 소중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농업은 ‘기르기’가 중심이 되는 삶의 길입니다. 먹이와 옷, 집의 원료가 되는 풀과 나무, 그리고 짐승들을 길들이고 기르는 일은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죠. 자연은 전체로 참여합니다. 사람을 기르는 교육과 양육에도 마찬가지 원리가 작용해야 하는데 산업 사회가 농경 사회를 대신하면서 그렇게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학교'라는 기관이 놓여있지요. 교육은 위기가 코앞에 닥쳐도 바뀌지 않으려 합니다.
학교라는 기구가 자연과 삶터에서 동떨어져 실험실 형태로 유지되어 온 게 문제라 봅니다. 실험실 같은 학교는 그 부지가 아무리 넓더라도, 시설과 장비가 아무리 좋고 정교하더라도 아이들을 ‘사람의 자식’으로 길러내는 데는 알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사람의 자식이기에 앞서 ‘자연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도 이제는 ‘지구공동생명체’가 시간을 마냥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더욱이 식량 자급률이 20%도 못 되 뜻밖에 이 부분에서 더 매우 위험할 수 있어요. 에너지 공급이라도 중단되면 도시인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곧 이런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도시는 ‘씨앗’을 너무 몰라요. 시골 사람 들은 죽어도 씨앗을 품에 안고 죽습니다. ‘위기 시에 어디를 가면 살 수 있다’가 있어야 해요. 이런 생명공동체가 여기저기 있어야 합니다. 급박해졌을때 함께 살아가자고 설득해야 하는데, 그 전에 먼저 안면을 익혀야 합니다. 공멸을 막고 살길을 여러 갈래로 열어 놓기 위해, 농촌으로 가는 사람들, 즉 ‘거점’이 많아져야 합니다.

 

Q. 학교가 사람을 키우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픕니다. 공부란 무엇일까요?
A. 크게 보아 앎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교과서나 참고서에서 읽은 지식이 있고, 수학 공식이나 물리학 법칙 같은 추상 지식이 있죠. 마지막으로는 실천으로 이어지는 앎이 있습니다. ‘나는 자동차를 운전할 줄 알아요’ 할 때의 ‘안다’는 즉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에 쌓은 지식을 아무리 많이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할 줄 아는’ 아이로 기르는 것, 그래서 그 아이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것. 그게 바로 부모와 사회가 해줘야 할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학생들에게 정답이 하나뿐이라고 가르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답을 맞혀야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필을 구하는 구조지요. 정답을 어른들이 정해주고, 아이들은 따라만 갑니다. 현실 어디에도 정답이 하나밖에 없는 문제는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의 의식과 감수성이 획일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교육에는 희망이 없다 봅니다.
매달 16일에 머리를 깎습니다. 아이들 교육을 잘못시킨 것에 대한 속죄이지요. 세월호 사고를 목격하고 ‘우리 교육현실이 사람을 죽는 길로 이끌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배가 기울어 물이 차오르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 학생들이 따랐어요. 본능에 맡겼더라면 뛰어 나왔을 아이들이, 그러지 않았던 겁니다. 본능보다 못한 공부가 교육이라니요.
교육이 근본을 잃었어요. 왜 배우느냐, 왜 가르치냐 거기에 대한 답을 정직하고 바르게 가져야 해요. 먹을 것 입을 것 다 타고 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배우고 나누어야 합니다. 교육이란 백년지대계가 아니고 ‘생존지대계’여야 합니다.

 

Q. 아주대생과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주십시오.

A. 한 번 쯤 참 자연 속으로 망명해 보길 권합니다. 초콜릿 복근도 만들어 볼 겸, 변산공동체라도 와서 3일만 견디길 바랍니다. 몸과 생각을 바꾸는 계기를 가지시길 권합니다. 작업복만 들고 오세요. 숙식은 책임집니다. ‘베적삼 흠뻑 적시며’ 우리 입에 들고 나는 걸 깊이 알게 되길 바랍니다.
‘하방’의 진정한 정신을 공부하시고, 경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자연이 가장 큰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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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만, 혼자서만 아는 공부 안돼
팔과 다리로 ‘할 줄 아는’ 사람 길러야 
교육, 코 앞에 위기 닥쳐도 잘 안 변해
실천하는 ‘앎’의 ‘생존지대계’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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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보리출판사 라운지에서 <아주인사이트> 팀과 인터뷰 중인 윤구병 선생

 

보리

보리 2016-01-12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수익이 나면 다시 책과 교육에 되돌리자. 보리출판사의 출판 정신입니다.

  • 이종태

    2016-02-13 13:29

    간암과 동행중이라니 안타깝네요. 오래 사셔서 더 많은 가르침을 주셔야 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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