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출판사

구병이 형님

형님을 처음 뵌지도 그럭저럭 20년이 넘었습니다. 90년대 초였던가요? 이러다간 식량 주권 다 빼앗긴다고, 이러다간 아이들 다 망가뜨린다고 농촌문제와 대안교육을 고민하시면서 그 편한 대학교수 그만두고 농촌으로 가시겠다고 했던 것이? 그 무렵 여름 어느 날 후배들과 모꼬지 가서 밤 새 논쟁을 했지요. 당연히 실패할 것이니 내려가시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고 실패하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 적극 응원해 드려야 한다는 뭐 그런 논쟁이었습니다. 논쟁 덕분에 그날 밤 술안주는 별로 필요가 없었던 기억입니다. 그 뒤로 형님은 몇 년 동안 방학마다 적당한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셨지요. 아마도 택리지를 쓴 이중환이나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처럼 말입니다.
95년 초 겨울이었나 봅니다. 느닷없이 저녁 같이 하자고 불러 내셔서 신촌 시장 쌈밥집에 앉아 저녁을 같이 하는데 이번 방학으로 학교를 그만둔다고. 그리고 변산으로 내려가신다고 했던 것이. 왜 변산이냐고 물었더니 ‘갯 살림과 산 살림 모두 생태가 살아 있어서 아이들 교육하기 좋아’ 하셨지요. 또 다시 형님 댁 식구들은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더니 ‘나 퇴직금 몇 천 만원 나와. 그리고 막내 대학 갔어. 자기들 힘으로 다니겠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시작된 술은 형님 하시던 출판사로 옮겨져 새벽에야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내려 가셨습니다 그려. 예전에 노비들이나 맡던 어느 집안 재지기로 말입니다.
그 좋은 대학교수직 마다하고 재지기를 맡아 동네에 들어온 형님을 희한하게 보면서도 지가 얼마나 있다 갈라나 하면서 타지 사람이라고 곁을 안 주는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무던히 애쓰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재지기였던 까닭에 제사 때 빼고는 늘 비어 있는 재실을 공동체 생활공간과 실험학교로 쓸 수 있었고 재실에 붙은 땅마지기까지 경작할 수 있었지요. 그러면서 하나 둘 몰려드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대안학교도 세우고 하던 무렵 공동체 생활이 넉넉하지 못해 조금이라도 보태려고 강연 의뢰가 들어오면 전국으로 발품을 팔고 다니셨습니다. 그러던 것이 벌써 15년. 이젠 공동체도 자리를 잡았고 대안학교도 꽤 많은 학생이 거쳐 갔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농사짓는 녀석, 대학 다니는 녀석, 이젠 사법연수원 들어가는 녀석도 있더군요. 그리고 공동체 식구 20여명에 주변에 독립해 나간 식구들 합쳐 50여명, 학생 10여명과 변산에 살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와 있는 손님들까지 이젠 늘 북적이는 곳이 된 듯 합니다. 게다가 공동체 식구들 집과 공동 식당과 창고, 학생들 30명은 족히 수용할 학교 건물과 손님 묵을 방에다 아이들을 위한 장학재단까지 만들었습니다. 작년 말 KBS 1 TV에서 방영한 [다큐멘타리 3일]에서 변산 공동체를 다루던데 시골 대부분 지역이 아이들이라곤 눈 씻고 봐도 없는데 우리 동네는 아이들 소리가 들려 너무 좋다는 동네 어른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변산 공동체와 공동체학교가 이제는 마을 사람들로 자리 잡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변산에 가서 고추모도 심고 김도 매려면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지만 95년 여름 후배들 50여명 끌고 농활한다고 처음 찾아갔을 때에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첫날 제게 주신 일은 콩 밭 매는 일이었지요. 살아오면서 그 때까지 농사일 한 번 제대로 못해 본 제 스스로가 부끄러웠지만 콩밭은 칠갑산 노래처럼 정말 땡볕이더군요. 더구나 농약을 안치니 콩대보다 풀이 더 많은 밭을 매는데 베적삼 아닌 난닝구깨나 적셨습니다. 이튿날엔 보여줄 것이 있다 하셔서 작은 산을 빙 돌아 으스스한 골짜기까지 따라갔지요. 그 자리에 있던 것은 형님이 변산의 자랑꺼리로 삼는 당산할매였습니다. 그 당산할매 불거진 옹이를 쓰다듬으며 자랑스러워 하셨지만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사실을 관념적으로만 이해하던 저로서는 그런 태도가 잘 이해가 안 갔습니다. 신경림선생 시에 ‘못생긴 놈들은 얼굴만 보아도 반갑다’더니 형님과 당산할매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지요. 그리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 와 이번에는 장독대로 끌고 가서 자랑을 하셨습니다. 시골서 도회지로 이사 가면 제일 먼저 버려진다는 항아리들. 진흙으로 만든 여러 층의 장독대 맨 위에 올랐을 때 눈 아래 펼쳐진 수 백 개의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보여 준 광경은 대군의 사열을 받는 것 같은 장관이었습니다. 그 항아리들에는 감식초, 백초 효소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지요. 그리곤 예전 어른들은 단오 전까지 염소가 먹는 풀은 모두 사람이 먹을 수 있다고 했다는 말을 들려주시면서 온갖 풀로 효소를 담근다는 말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구병이형

3년 전 가을에는 서울 합정동에다 민족의학연구원이라는 재단법인을 꾸리고 그 1층에 ‘문턱 없는 밥집’과 ‘기분 좋은 가게’를 꾸리셨지요. 멀리 의료보험 기금 고갈이 올 때 닥칠 민영화에 대비해 민족의 건강을 지키는 보루로 전통의학을 연구하는 단체를 만들면서 건강이 먹을거리와 생태를 떠나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셨지요. ‘문턱 없는 밥집’은 유기농만으로 식단을 만들고 점심은 돈 받는 사람도 없이 통에 넣고 가는 집이지요. 도심의 어려운 사람들도 건강할 권리가 있으니 밥값은 형편껏 내지만 밥그릇은 절 밥처럼 빈 그릇으로 돌려줘야만 하는 집.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서 기증받은 되살림 물품과 변산의 유기농 농산품에다 공정무역 물품, 좋은 책과 차를 파는 ‘기분 좋은 가게’. 여기서는 지역 단체들과 함께 공부방도 운영하고 있지요. 더구나 밥집과 가게가 자리를 잡자 이제는 인천에 2호점을 내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니 가난한 유기농 생산자와 도심의 어려운 사람들, 그리고 생태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먹을거리로 연결되어 같이 등 비비며 사는 구조가 만들어진다고 하셨지요. 이런 일들 모두가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일을 벌려 놓는 동안 그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아 온 가족들과 지인들에 대한 빚은 어떻게 갚으시렵니까? 이젠 70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비명횡사도 자연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니 이생의 빚을 받을 날도 멀지 않은 듯 합니다.
십 여 년 전이었나 지금은 신부님이 된 후배가 그러더군요. 형님은 농부가 아니라 농부의 이데아라고. 진짜 농부는 자기가 농부라고 드러내놓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형님은 늘 스스로의 직함을 농부라고 내놓는 사람인데다 보통 농부는 농약에 절어서 눈동자가 맑지 못한데 형님은 눈동자가 반짝거린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후배 말이 다 틀린 성 싶습니다. 공동체학교 졸업생들이 그러더군요. 들에서 일하는 노작시간보다 형님이 가르치던 철학 시간이 제일 재미 없었다구요. 또 손님 왔을 때만 공연히 돌 들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신다구요. 그런 거 보면 농부는커녕 여전히 철학자 때를 못 벗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연사 같은 비명횡사라도 아직은 멀었습니다. 아직도 못한 농사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법을 자연에서 배우고 가난하더라도 밥상머리에 함께 앉아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세상을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