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70년대 초, 서울 양평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 양화대교가 있던 자리였지요. 어린 시절 어른들이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놀렸던 기억이 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진짜 다리 밑에서 태어났네요.
양평동은 한강과 가까이 있는 곳이라 동무들과 늘 물놀이하던 생각이 납니다. 강 건너가 난지도였는데 쓸게기가 많이 쌓인 섬이었어요. 동무들과 보물을 찾자며 냄새나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쓰레기를 뒤적거렸지요. 지금은 억세가 뒤덮인 아름다운 공원이 되었지요.
그렇게 동물들과 재밌게 놀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낙서를 많이 했답니다. 부모님이 일을 나가셧기 때문에 혼자서 노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그림 그리기가 자연스러운 놀이가 된 것 같아요. 그렇게 놀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어느새 훌쩍 세월이 흘러 만화가가 되었답니다.
보리출판사에서 호랑이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 때, 아이들한테 호랑이의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우리는 흔히 호랑이를 무섭거나 사나운 동물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동물원이나 텔레비전에서 보는 호랑이도 덩치가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어흥'하고 울부짖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우리 옛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는 무섭기도 하지만 우스꽝스럽고 장난기 있는 모습도 많아요. 옛사람들이 호랑이를 통해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나타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 자료도 찾아보고 고민하다가 옛사람들이 즐겨 그리던 민화를 보면서 영감을 얻었답니다. 그림을 특별히 공부하지 않은 평범한 서민들이 그린 호랑이 모습에서 옛사람들이 가진 자유로움과 상상력, 재미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호랑이>도 잘 그려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민화처럼 재미있고 자유롭게 그리려고 했습니다.
첫째 마당인 옛이야기 그림책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는, 옛날 옛적은 색이 없는 세상일 거라고 상상하고 흑백으로 그려 보았습니다. 대신 호랑이 눈과 혓바닥에 색을 입혀 무서움을 강조했어요.
둘째 마당 옛이야기 만화 '호랑이 형님'에서는 색을 다채롭게 입혀서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순박하고 착한 호랑이로 변하는 모습으로 그려보았답니다. 색채가 입혀진 호랑이에서 사람보다도 더 착한 모습이 보이도록 한 것이지요.
이렇게 나쁜 호랑이가 착한 호랑이로 변하는 모습을 색의 변화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어렸을 때 시골집에 놀러 가면 밤새 할머니께서 앞산 호랑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답니다. 호랑이가 어흥 하고 마을에 내려와서 사람한테 해고지하던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이 힘을 합쳐 호랑이를 물리친 이야기들이 밤새 쏟아지는 별처럼 제 마음을 흔들었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산을 보니 산자락이 구불구불 호랑이 등 무늬 같았어요.
우리 산에서 자취를 감춘 호랑이는 우리들 마음속에서 얼마든지 여러 모습으로 살아날 수가 있답니다. 아이들이 <호랑이>를 읽은 다음 '나는 어떤 호랑이를 그려 볼까?' 상상하며 스스로 그리게 해 주세요. 우리를 두렵게 하는 호랑이가 아닌 우리를 보살피고 함께 살아가는 동무 같은 호랑이를 그려 보는 건 어떨까요?
부디 <호랑이>가 개똥이들한테 세상을 살아가는 무서움과 두려움을 지혜롭게 이겨 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주기를 바랍니다.
<보리 어린이 문화 · 겨레상징 동식물> 시리즈 1권 <호랑이>
우리 민족은 동물이나 식물에 여러 가지 이야기와 의미를 담았습니다. 설화와 민요, 민화로 전해진 호랑이, 늑대, 여우, 거북, 토끼 같은 동물들로부터 쑥, 마늘, 인삼, 그밖에 약초들까지 연 손가락을 열 범 쥐었다 폈다 해도 다 헤아리기 힘들지요. 우리 민족 문화에 담긴 동물과 식물을 들여다보면 우리 민족의 정서와 의식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과 교감하며 함께 살아온 것이 우리 민족의 뿌리입니다.
이렇게 우리 문화 속에 깃들 동식물을 이해하고 그 안에 담긴 옛사람의 지혜와 슬기를 배울 수 있는 책, 우리 겨레와 가깝게 지내 온 동물과 식물들을 통해 우리 문화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는 책으로 기획한 시리즈가 '보리 어린이 문화. 겨레상징 동식물'입니다.
이 시리지 첫 번째 책인 <호랑이>는 우리 겨레를 상징하는 으뜸가는 동물이지요. 우리 나라는 산이 많아서 골짜기마다 호랑이가 살았어요. 그래서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두려워했습니다. 옛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이겨 내고자 호랑이를 신령스러운 산신으로 모시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만들기도 했지요. 그만큼 호랑이는 우리 문화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호랑이의 순 우리말인 '범'을 '밤'이라고도 했습니다. 옛사람들은 빛이 없는 밤도 '범'만큼 두려워했습니다. 오랫동안 범과 밤을 두려워한 옛사람들은 '곰(하늘)',과 '범(밤)'이 '단군(해)'과 짝을 이루는 단군신화를 빚어내기도고 하고, 범(밤)한테 쫓겨 나무 위로 올라간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어 범, 곧 밤을 몰아내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라는 이야기도 지어내습니다. 이것이 호랑이가 나오는 많은 옛이야기 가운데서도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먼저 읽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효자 효녀가 나오는 호랑이 이야기도 꽤 많은데 여기에 나오는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잘 살게 도움을 줍니다. 옛사람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하는 걸 큰 덕목으로 여겼는데, 부모한테 효를 다하는 일은 호랑이도 감동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호랑이 형님'에 나오는 호랑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옛이야기에는 호랑이가 힘없는 백성들을 돌봐 주었으면 하는 소망도 담겨 있습니다.
<호랑이>는 옛이야기 가운데 대표적인 호랑이 이야기를 그림ㄹ책과 만화로 그려 낸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우리 나라에 살았던 호랑이를 세밀화로 그려 아이들이 호랑이 생태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새끼 시절부터 다 자란 모습까지 호랑이의 씩씩한 기상을 느낄 수 있지요.
<보리 어린이 문화 · 겨레상징 동식물>은 앞으로 소, 닭, 돼지, 두꺼비, 여우 들이 쭉 이어 나옵니다. 점점 제 색깔 제 문화에 대해 감각을 잃어 가는 우리 아이들한테 꼭 필요한 책이 될 것입니다.
글쓴 이 | 박건웅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 시절을 거치며 우리 나라 역사에 숨겨진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그리기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삽집의 시대> <노근리 이야기> <섬소년> <아이와 함께 읽는 동화 토지> <내 똥 내 밥> <호랑이>들이 있다.
2012년 9월 <호랑이> 회의를 하러 보리출판사에 오신 박건웅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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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출판사가 달마다 펴내는 부모와 어른을 위한 책
<개똥이네 집> 2013.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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