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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 선생님" 갈래 글75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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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대체로 일찍 철들게 하고 철나게 합니다.
시골에서 겪는 가난은 더 그렇습니다.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논밭 팔고 집 팔아 서울로 온 지 한 해 만에 자식 여섯을 잃고
나머지 자식들이라도 살리겠다고 다시 시골로 돌아온 부모 밑에서 저는 가난을 지긋지긋하게 맛보았습니다.
나머지 자식들을 까막눈으로 길러야 살아남게 할 수 있겠다는 아버지의 뜻이 너무 굳어서
저는 4년 동안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농사일을 거들면서 자연의 아이로 자랐습니다.
6.25 전쟁 뒤로 거푸 흉년이 들어서
왕겨도 갈아 먹고, 수수껍질도 갈아 먹고, 소나무 속껍질로 배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보리 풋바심에 말린 쑥을 버무려 찐 쑥버무리도 어쩌다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자연이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봄에는 삘기와 찔레순으로 허기를 달래고, 여름에는 피라미랑 모래무지로,
가을에는 메뚜기, 한겨울에는 참새를 잡아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이렇게 한 철 한 철 접어들면서 철이 들고,
한 철 한 철 나면서 철이 납니다.
자연 속에서 몸 놀리고 손발 놀려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키워 갑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철을 모릅니다.
제철 음식도 모릅니다.
그러니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기 힘듭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 스물이 넘어도 제 앞가림을 못해 부모한테 기대 삽니다.

철없는 아이를 철들게 하는 가장 큰 가르침은 자연이 베풉니다.
그러나 시골에 살아도 살림이 넉넉한 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철이 더디 납니다.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을 수 있는 집에서 아쉬울 것이 없이 크는 아이들은
가난한 집 아이들과 어울려서 산과 들, 바닷가를 쏘다니면서 제 손으로 먹을 것을 찾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 어머니가 저한테 베푼 가장 큰 사랑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혼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일찍부터 길러 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차지하고 '없는 이'들은 더 '없이'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면서
부모들의 자식 걱정은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밖에 없는 부모들 걱정은 더 큽니다.
빨리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낌새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저는 논밭 팔고 집 팔아서 서울로 삶터를 옮겼다가 된맛을 보고,
빈손으로 다시 자연으로 돌아온 우리 부모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는 까막눈이었고 아버지도 신교육을 받지 못한 분이었지만,
이분들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제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미물'들도 다 살아남는데
사람 새끼로 태어나서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속담에 기대 저희들을 자연의 품에 맡긴 부모 덕에
저는 같은 또래보다 조금 일찍 철이 든 셈입니다.
자연은, 그리고 그 자연이 둘러싸고 있는 시골은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마지막 삶터입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윤구병, <개똥이네집> 2013년 7월호.




편집 살림꾼 지리소

편집 살림꾼 지리소 2013-07-31

古傳을 만들면서 苦戰을 면치 못하다가, 책 만드는 일에도 사는 일에도 고전하고 있는 困而知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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