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벗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저런 '친구'들은 많다.
학교 친구, 직장 친구, 동아리 친구,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 술친구, 뜻이 맞는 친구........
그러나 한평생 기쁨과 슬픔, 좋은 일과 궂은 일을 함께 겪었고, 겪을 수 있는 벗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이 거의 다일게다.
우리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 할머니, 그 할머니들이 살던 마을 공동체에서는 그런 벗들이 둘레에 수두룩했다.
같은 해에 태어나 함께 소꿉장난하고, 숨박꼭질하하고, 연 날리고, 공기놀이하던 벗,
그리고 자라서 함께 모 심고, 김 매고, 옹기종기 모여 길쌈하고, 그네 타고, 널 뛰던 벗,
나이 들어 우르르 모여 사랑방에서 새끼 꼬고, 삼실 잣고, 윷놀이하던 벗,
늙어서 나무 그늘 아래서 장기, 바둑 두고, 옛 추억 주고받으며,
'늙으면 죽어야지' 하고 함께 푸념을 나눌 수 잇는 벗이 바로 이웃에 있었고,
돌 때 사립문 곁에 심은 오동나무, 모정 가를 두른 느티나무와
평생을 씨 뿌리고 가꾸던 보리, 밀, 수수, 벼, 콩, 배추, 무, 상추 같이
서로 목숨을 주고받고, 목숨을 지키고, 목숨을 나누는 다른 벗들도 있었다.
그 벗들이 정을 나누고, 뜻을 같이 하여 두레패도 만들고,
풍물패도 만들고, 잔치도 함께 즐기고, 상여도 함께 맸다.
벗은 서로 그러기로 손가락 걸고 맹세를 하지 않더라도,
늘 곁에 있으면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등 돌리지 않고 도우면서 살았고,
마을 살림을 함께 했다.
벗에 둘러싸여, 벗과 함께 오순도순 서로 도우며 사는 삶은 얼마나 든든하고 복에 겨운가.
그러나 젊은이들이 새로 생긴 낯선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서
저마다 제 밥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에서는 제 이웃을 돌볼 겨를이 없다.
저마다 제 앞가림하기 바쁘니, 그리고 저도 못살아 허덕이는 터에
어떻게 '친구' 일에 발 벗고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어느 틈에 고향을 잃으면서 벗들도 잃어버렸다.
설이나 추석 명절에 어쩌다 고향 마을에 돌아가
함께 자라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했던 낯익은 얼굴을 보면서
그 순간 깜짝 반가워해도 그이들 사이는 이미 '벗'이 아니다.
낯익은 산과 들에 자라는 나무와 풀들이 손짓해도,
그것들이 우리 집 울타리를 두르고 목숨을 지켜 주던 또 다른 벗임을 알아보지 못한다.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러 주고, 서로 도우면서 사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 교육인데,
크게는 아이들 곁에 자연이라는 큰 스승이 없고,
작게는 오순도순 도와서 살던 '꾀벽쟁이' 벗들도 없으니,
이 도시라는 '인간의 사막'에서 태어나고 자랄 수밖에 없는 우리 아이들이
언제 어디에서 제 앞가림하고 오순도순 도우면서 살 힘을 얻을 수 있을까?
거대도시가 키워 내는 저 빌딩 숲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값어치도 없다는 걸
언제쯤에나 미욱한 중생들이 깨우칠 수 있을까?
-윤구병, <개똥이네집> 2011년 12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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