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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치가 아이로 그려진 까닭


 

 

 

 

어릴 때 우리 집에 책이 없어 멀리 있는 이모 댁에서 사촌 형 책을 빌려 보곤 했다. 외아들인 사촌 형은 내 눈높이에 맞는 책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전집으로 된 동화책이 많았는데, 글을 잘 모르던 때라 그림으로만 내용을 읽었다. 그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끌던 책이 있었으니, 바로 전우치전이었다. 도술로 악당들을 혼내 주는 이야기는 통쾌하고 신났다. 큰 바위를 번쩍 들어 올리는 그림은 지금도 머리에 생생하다. 내 기억이 분명하다면 나는 홍길동보다 전우치를 먼저 만났다.

개똥이네 놀이터에 옛이야기를 만화로 연재하는 내내 전우치가 머리에 맴돌았다. 꼭 해 보고 싶었다. 어릴 때 느꼈던 감흥을 어린 독자들과 함께 느끼고 싶었다. 전우치! 이름만 들어 봐도 참 재미있지 않은가.

 

 

전우치전을 준비하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우치가 실제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조선 중종 때 말단 관직을 지내면서 틈틈이 도술 공부를 하였는데, 백성을 현혹한다 하여 감옥살이를 하다 죽은 비운의 인물이다. 죽은 뒤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사람들이 전우치 무덤을 파 보니 시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어낸 이야기가 분명한데 왜 이런 허황된 뒷이야기가 만들어졌을까? 그때 사람들도 전우치라는 인물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안타까운 죽음이 백성들에게 고달픈 삶을 떠올리게 한 것은 아닐까? 이야기꾼들은 전우치를 이야기로 만들어 세상을 풍자하고 조롱했다. 실존 인물에서 다시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다시 소설로 전우치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고 있는 셈이다. 그만큼 전우치는 보통 사람들 피부에 와 닿는 영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다듬고 캐릭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원작과 다르게 전우치를 여덟아홉 살쯤 되는 아이로 설정했다. 원작에서 보여 준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아이들 모습과 닮아서 어린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고 보았다. 또 원작이 가지고 있는 풍자와 심판에 대한 어른 시각을 조금 덜어 내고 싶었다. 나는 이야기가 어린아이가 치는 개구진 장난과 놀이로 보이길 원했다. 아이들은 즐겁게 노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전우치 머리는 흰머리로 뻗치게 그려서 신비감과 익살스러움을 나타냈고, 눈은 커다랗지만 감정을 읽기 힘든 뚱한 표정으로 그렸다. 펄럭이는 도포 자락을 그려 넣으니 내가 보기에도 그럴싸해졌다.

만화를 그리다 보면 억지로 캐릭터를 만들거나 이야기를 쓰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독자들이 바로 재미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반대로 캐릭터나 이야기가 순식간에 확 그려질 때가 있다. 이런 때는 작가 스스로도 재미있고 독자들도 어김없이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인다.

 

전우치전은 처음에는 옛이야기로 3회에 걸쳐 연재를 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편집자 말을 빌려 보면 뜨거웠다.’고 한다. 개똥이네 놀이터편집부에서 전우치 이야기로 장편 만화를 연재하자고 제안을 했고, 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주어진 시간은 석 달.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장편 연재는 처음이라 겁이 많이 났다. 선배 작가들한테 조언을 구해도 늘 대답은 똑같았다. “해 보면 다 하게 되니 겁먹지 마라.” 이미 겁먹은 나에겐 뜬구름 같은 이야기였다. 세 달은 화살처럼 지나가고 준비 과정은 지지부진했다. 결혼 준비로 정신은 산만했고, 마감 날짜는 전속력을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편집부 걱정은 커져 갔고, 나는 변명만 늘어놓다 편집장에게 따끔하게 혼이 나기도 했다. 담당 편집자는 원고를 주기 전까진 결혼식에 못 보낸다고 엄포를 놓았다. 둔한 머리를 부여잡고 뒹굴어 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2년 동안 단편 연재에 적응된 머리를 장편 연재 체질로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단편 만화가 주는 감정과 장편 만화가 주는 감정은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뭐 하나 제대로 잡히지 않는 와중에도 분명한 것은 있었다. 바로 전우치전을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그린다는 것이다. 알려질 대로 알려진 이야기를 또 만화로 그릴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전우치가 가진 성격이나 개성은 지키면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말괄량이 삐삐였다. 책을 읽으며 삐삐 같은 친구가 옆집에 산다면 얼마나 신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안녕, 전우치?를 연재하면서 어릴 때 기억을 아주 많이 떠올렸다. 나는 총각이었고 아이들한테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아저씨는 왜 그렇게 키가 작아요?” 하면서 순진무구하게 물어 오는 아이들을 무서워했다. 그런 사람이 아이들이 보는 만화를 그리자니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마음속 어린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어떤 일이 가장 신났을까? 동무들과 하루 종일 놀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저녁을 먹고, 부모님 사랑을 느끼며 단잠에 빠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든 어린이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나게 노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다. 아쉽게도 요즘 아이들은 놀 권리를 많이 빼앗기며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아이들한테 전우치가 같이 신나게 놀러 다니는 동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감 효과일까 아니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일까? 고민하던 것들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전우치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다 또 다시 벽에 부딪치게 됐는데 다름 아닌 전우치때문이었다. 전우치는 도술을 거침없이 마음대로 쓰는 신에 가까운 존재로, 어떤 갈등도 전우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캐릭터를 잘못 다루면 허황된 이야기로 흘러가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 나는 전지전능한 전우치를 인간에 가깝게 끌어내리기 위해 둔한 머리를 다시 굴려야 했다. 그러다 예전에 읽었던 책 구절이 떠올랐다. 아이들 성장 과정에서 동무가 하는 역할에 대한 것이었는데, 어린 시절 동무는 서로를 확인하는 거울이라는 내용이다. 번뜩하고 뭔가 떠올랐다. 전우치에게 거울을 만들어 주자! 그 아이다움을 확인할 수 있는 거울을 만들어 주면, 독자들도 전우치가 사는 세계에 좀 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거울이 바로 석이. 석이는 평범한 요즘 아이로 설정했다. 조카 녀석이 모델이 되었다. 석이가 태어나자 뜬구름 같은 이야기들이 땅으로 내려와 현실감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 전우치와 신나는 모험을 떠날 준비가 다 갖추어진 셈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 하루 전날 연재 첫 화를 겨우 마감할 수 있었고, 편집자들에게 축복 받으며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다. 안녕, 전우치?2년 남짓 연재되었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그 때문인지 마지막 원고를 끝마치고는 울컥해서 울고 말았다. 가끔 사람들이 전우치는 어떤 작품이냐며 물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릴 때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봤던 선배 만화가들이 한 말을 떠올리며 똑같이 말한다.

 

내 자식과도 같습니다.”

 

 

<개똥이네 집_72호> 마음으로 만든 책 

 

 

 

 

 

 

고전 소설 속 주인공인 전우치가 하민석 작가 특유의 재치와 익살로 우리 곁에 다시 살아났어요. 

겁 많고 호기심 많은 석이는‘이상한 집’에 사는 전우치랑 동무가 돼요. 전우치 집에 놀러 가면 날마다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엉뚱하고, 이상하고, 신기한 동무들을 모두모두 만날 수 있어요.

 

안녕 전우치 1, 2권 | 2010-02-05 | 하민석 | 권마다 11,000원

 


편집 살림꾼 누리짱

편집 살림꾼 누리짱 2011-12-08

보리출판사가 만든 그림책 브랜드 개똥이에서 세상의 모든 그림책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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