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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마주 이야기" 갈래 글122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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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1주년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윤구병 선생님이 뜬금없이 "이오덕 선생님이 생전에 어린이문화운동단체를 만들고 싶어 하셨지요? 그리고 어린이 잡지도 내고 싶어 하셨는데 보리에서 그걸 해야겠어요. 이주영 선생님이 좀 나서 주세요." 하셨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어린이>처럼 어린이를 위한 좋은 잡지 하나 없다고 하시면서 어린이한테 줄 수 있는 잡지를 만들면 좋겠다는 말씀은 여러 자리에서 하셨지요. 또, 어린이문화운동을 하는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1988년 무렵부터 하셨던 말씀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어린이문화운동단체에 대해 어느 정도 틀을 잡을 때가 1989년 초부터인데, 취지문을 써서 직접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한테 보내셨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이오덕 선생님한테 1989년 5월 21일 자로 보낸 편지에 보면 '어린이 민족문화운동'이 얼마쯤 준비되었는지 궁금하다면서 어린이문화운동이 '인간 세상의 부조리를 바로잡는 일'과 '바른 교육과 건전한 생활환경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고 쓰셨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저한테 그 단체 사무국장을 맡아 달라고 하셨는데, 1989년에 만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정부가 탄압하면서 한창 정신없이 바쁠 때라 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자꾸 맡으라고 하시면서, 문화운동이라고 하여 범위가 너무 넓어서 힘들면 우선 어린이문학을 중심으로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에는 제가 다른 어떤 일을 맡아 새로 펼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준비 모임에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린이문화운동단체 대신 조금 좁혀서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회칙을 보면 부노가 모임에 문학뿐만 아니라 어린이문화 전반을 다 담고 있는데, 어린이문화운동을 해야 한다는 이오덕 선생님 생각이 크게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윤구병 선생님이 그런 역사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오덕 선생님 뜻을 이을 수 있는 어린이문화운동단체를 만들자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면 돈이 꽤 많이 들기 때문에, 보리에서는 동호인끼리 돌려 보는 기관지가 아니라 팔리는 어린이잡지를 만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이운동을 하는 여러 단체들이 모여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협의회 정도를 만들어 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활동하고 있거나 알고 있는 어린이문화운동에 관련된 단체에서 대표나 실무자 한 명이 참여하는 모임을 한 달에 한 번씩 마련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보리에서 만들려고 하는 어린이잡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 어느새 안으로나 바깥으로나 그 모임 성격이 잡지 발간 추진위원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이문화운동단체를 만드는 일은 더 나아가지 못했고 어린이 잡지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게 <개똥이네 놀이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온 어린이 잡지는 1923년 3월 20일에 첫 호를 펴낸 <어린이>입니다. <어린이>는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교육. 문화운동을 펼치기 위해 만든 잡지입니다. 천도교에서 종합잡지 <개벽>을 처음에 내고, 두 번째로 여성계몽운동을 위해 <부인>을 내고, 세 번째로 어린이운동을 위해 <어린이>를 내게 된 것입니다. 이 잡지가 처음에는 그냥 준다고 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었는데, 얼마 안 가 수만 부를 찍어서 한반도는 말할 것 없고 북간도와 일본을 비롯해 우리 겨레가 사는 곳곳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흑룡강 가까이에 사는 독자가 <개똥이네 놀이터>를 보고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개똥이네 놀이터>를 읽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 모습도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북녘에 사는 어린이도, 일본에 사는 어린이도, 미국에 사는 어린이도, 유럽에 사는 어린이도, 아프리카에 사는 어린이도.... 삼천리금수강산 방방곡곡 아이들과 지구촌 곳곳에서 살아가는 우리 겨레 아이들,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아이들이 <개똥이네 놀이터>를 읽으면서 살아가는 날을 만들고 싶습니다.

잡지는 책을 매개로 하는 문화운동 가운데 가장 앞자리에 있습니다. 다달이 새로운 내용을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비슷한 생각으로 비슷한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이 만들게 되고, 마찬가지로 그와 비슷한 생각과 꿈을 가진 어른들이 사 주게 됩니다. 물론 어른들이 그렇다는 것이고, 어린이 독자들이야 그냥 읽고 보는 재미만 있으면 되었지요. <어린이>가 수만 부가 팔리고, 1920년대와 30년대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이 두가지가 잘 어우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개벽사로 <어린이> 값을 보내 온 어린이운동단체가 많았는데, 천도교 소년회만도 80곳이 넘었습니다. 방정환 선생님이 대표로 활동하던 조선소년운동단체지역 지부만도 수백 겨였으니 그 힘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방정환 선생님이 펼치신 어린이문화운동과 잡지 <어린이>가 우리 겨레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 잡지는 <어린이> 뒤로도 많이 나왔습니다. <어린이나라>, <진달래>, <어린이 세계>, <소년>, <소년세계>, <학생>, <새소년>, <어깨동무> ... 그리고 2000년대 지금 <개똥이네 놀이터>, <고래가 그랬어> 같은 어린이 잡지가 나오고 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린이 잡지는 돈 버는 일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린이>도 초기에는 개벽사에서 일 년에 수만 워씩 적자를 보면서 펴냈고, 다른 잡지들도 개인이나 출판사, 또는 단체에서 후원을 받아 만들어 왔습니다. 어린이 잡지를 잘 만드는 일이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이런 속담을 잘 안 쓰는데, 청소년과 어린이 자살이 많아지는 우리나라에서는 깊이 새겨 봐야 할 말 같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귀한 아이들이 아무 탈 없이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나라고 '개똥이'라고 불렀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개똥도 자기 존재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을 동화 <강아지똥>에 담아내셨습니다.

'개똥이'라는 말을 어떤 뜻으로, 어떻게 쓰든 저는 소중한 우리 아이들이 '개똥이'처럼 개똥밭에서 마음껏 뛰어놀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탈없이 잘 자나라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내일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런 꿈과 소망을 <개똥이네 놀이터>에서 키워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옛날에 아이들은 모두 개똥이였습니다.
개똥이가 가장 예쁜 이름이었대요.
"개똥아! 개똥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아이들을 그렇게 불렀지요.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를 읽으면 우리 모두 개똥이가 되겠네요.
개똥이는 씩씩하고 정이 많은 아이니까요.

권정생 선생님

글쓴이 | 이주영
서울 마포초등학교 교감.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어린이도서연구회,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계간 <어린이문학>을 편집하고 있다.


보리출판사에서 펴내는
부모와 어른을 위한 책 <개똥이네 집> 2009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보리

보리 2010-08-01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수익이 나면 다시 책과 교육에 되돌리자. 보리출판사의 출판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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