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출판사 블로그

이 글은 월간 <민족21> 2010년 1월호 동행동감 꼭지에 실린 내용입니다.

글 | 정용일 취재부장
사진 | 유수

세밑이다. 무릇 시간이란 사람들이 제 좋을 대로 그어 놓은 관념의 울타리에 불과하건만, 사람들은 거기에 맞춰 종종 걸음을 치기도 하고 각오를 새롭게 다지기도 한다.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사람들의 마음은 무언가 간절한 소망과 기대를 담기 마련이다. 경제한파와 실업률 증가, 빈부격차 심화와 환경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지방자치선거,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한판 승부가 예견되어 있는 2010년이다. 혹자는 새해를 2012년, 나아가 향후 20년을 좌우할 분수령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새해를 맞는 지금, 한 해살이가 아니라 10년, 20년을 내다보며 우리가 들어야 할 화두는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15년 전 잘나가던 대학 교수직을 박차고 연고도 없는 변산반도에 농촌공동체와 학교를 만들고 도시와의 연대와 조화로운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피땀을 흘리며 손마디가 굵어진 '농부' 윤구병. 세밑인 지난 12월 11일, 선생을 만나 새해 화두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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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태복빌딩 1층에 있는 '기분 좋은 가게'에서 만난 윤구병 선생은 방금 막 농사짓다 온 차림에 옆구리에는 새로 출간할 만화책 원고 뭉치를 끼고 있었다. 대지의 향이 물씬 풍기는 국화 차를 따르자마자 우선 신년화두부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정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어디라고 봅니까?"였다.
통상적인 대답이야 당연히 미국이겠지만 선생이 그런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터.
"글쎄요. 미국과 싸워서 이겼거나, 싸우고 있는 나라들 아닌가요? 예를 들면 베트남이나, 북이나…."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비록 생활은 곤궁하지만 자기를 잃지 않고 산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진 것이고 6․25전쟁은 아직 정전 상태니까 승패를 가르기 어려우니 아주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아프가니스탄이 세상에서 제일 센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무장 세력이 5만 명밖에 안 되는 나라가 근 10년 가까이 미국과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은 혼자 쳐들어가기 두려웠던지 자기 뒤로 66개 연합국을 편성해서 쳐들어갔는데도, 지금 탈레반 세력은 점점 늘어가고 연합국은 점점 힘이 쳐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아프가니스탄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저는 그 힘이 가난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겨울에 여름옷을 입어도 견딜 수 있는 힘, 제 나라 제 땅을 남에게 한 치도 내주지 않으려는 의지가 결합이 돼서 그 힘이 나온다고 봅니다."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파시스트적 발상

말씀하신 가난이 단순히 헐벗고 굶주린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가난한 삶,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죄 없이 삽니다. 자원을 가장 아끼고 삽니다. 그러니까 생명에너지에 의존하는 사람만큼 강한 사람들이 없어요. 왜냐? 우리는 생명에너지를 통해서 의식주를 궁극적으로 해결합니다. 물질에너지를 통해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닙니다. 몸 놀려서, 손발 놀려서 자연과 함께 소통함으로써 의식주에 필요한 것을 얻어내지 않으면 어떤 제국주의 나라도 며칠 못 버팁니다. 이 근본이 되는 힘에 대해 눈뜨지 못하고, 물질에너지를 가공해서 얻어내는 힘으로 생명에너지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가난이 아니라 뭔가 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적들이 던져주는 빵이나 유혹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지켜나가고자 하는 뭔가가 말입니다.

"자율성입니다. 가난이 뒷받침하는 자율성이 힘을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체성, 자유의지, 혹은 자유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자율성은 모든 생명체의 본질입니다. 길가의 질경이조차도 언제 싹 틔우고 꽃 피우고 열매 맺으라는 타율적 통제에 의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자기 삶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율성이야말로 생명체의 근본을 이루는 힘이기 때문에, 이 힘이 온전히 갖춰진 나라, 혹은 집단일수록 힘이 강화되는 겁니다. 이걸 생명공동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ꡐ인간만이 희망ꡑ이라는 말은 듣기는 좋지만, 옳지는 않습니다. 정반대로 인간이 모든 생명공동체를 말살하려는 원흉이 되고 있어요. 이건 서구식 사고 방식을 반영하는 겁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서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 신이 인간에게 베풀어 준 시혜라고 생각하지, 생명공동체 자체가 인간을 만들어내고 인간의 오늘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말 자체가 틀린 건 아니라고 봅니다. 자율적 의식을 가지고 자기와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바람직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주체가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죠. 문제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기 때문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ꡐ사람답다는 것은 무엇인가ꡑ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려면 아이 때부터 놀아야 하고 놀려야 합니다. 최근에 쓴 글의 제목이 ꡐ아이들이 놀아야 나라가 산다ꡑ입니다. 이때 논다는 말은 빈둥거린다거나 게임을 한다거나 TV를 본다는 말이 아닙니다. 손발 놀려야 한다, 몸 놀려야 한다는 얘깁니다. 손발로, 몸으로 일해서 의식주와 삶에 필요한 온갖 것들을 얻어냅니다. 손발 부지런히 놀린다, 몸 놀린다는 것은 결국 열심히 일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육체노동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재미있게 느껴야 나라가 살고 인류가 삽니다. 머리만 굴려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파시스트같은 생각입니다. 이건 한 사람의 지배 하에 다른 사람들이 기생한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하면 한 사회고 나라고 인류고 몰락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어요. 현재의 자본주의 도시사회는 빨리 재편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붕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문명의 발전에 따라 도시의 형성은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국가도 마찬가지구요.

"물론입 니다. 각 마을이 자율성을 유지하되 전체적인 어려움, 가뭄, 홍수 같은 자연재난이 닥쳤을 때 집단안전보장 차원에서 서로 돕는 더 넓은 단위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국가와 인류공동체가 필요했지요. 문제는 균형입니다. 공동체에도 사람의 두뇌에 해당하는 부분, 중심부가 필요합니다. 없어서는 안됩니다. 인류가 두뇌의 발전을 지향하면서 진화해 온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머리가 몸 전체의 10분의 1 정도인데, 마찬가지로 도시 기능은 아주 적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나머지는 자연과 어우러져 사는 생태공동체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저 같은 노인네가 도시에 있는 사람 20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허덕거리고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데, 균형이 깨졌어요. 이런 상황에서는 앞으로 5년도 못 갑니다. 인류 생명창고의 열쇠를 쥐고 있는 농민이 없으면 세계 어느 나라 농민이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겠어요. 우리 농민들이 우리를 먹여 살려야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국가가 됩니다. 북녘에서 오랜 동안 척박한 땅에서 식량자급을 이루기 위해 애썼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라고 봅니다. 궁극적으로는 통일이 돼야 남녘의 넉넉한 식량과 북녘의 지하자원, 공업과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온전한 나라로 설 수 있습니다."

생명에너지를 만나고 활용할 수 있는 농촌으로 가야한다.

말씀을 들으니 우리는 이중적 기형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나라의 허리가 잘려 있고, 그나마 남쪽 사회도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는 기형적 형국입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도시에서 대안교육을 할 수 없는가, 그리고 도시에서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앞당길 수 없느냐고. 그런데 그런 희망을 보았다면 왜 내가 대학 선생질 때려치우고 시골에 내려가서 늙은 몸으로 땅에 엎드려서 농사를 지었겠습니까(웃음). 의식주 문제가 근본인데, 농어촌 생산공동체에서 몸 놀리는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이 앞장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청계천에서 옷 만드는 여성 노동자들이 밤낮 없이 몸 놀려서 우리가 이런 옷을 걸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도시는 구조상 육체노동이 점점 둔화되고 약화됩니다.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몸 안 놀리니까 몸 놀릴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지배자가 되지 않으면 몸 놀리는 사람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말 안 들으면 총칼 앞세우고, 경찰․군대․사법․검찰 같은 폭력적인 국가기구를 앞세워서 지배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육체노동하는 사람들은 이중고를 겪게 됩니다. 노동의 자기 실현, 해방된 노동이 아니라 노예노동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식들만큼은 육체노동을 시키지 않으려고 야간학습, 자율학습, 방과후, 학원에 보내 온통 죽음의 길로 들어서고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농촌으로 가야 하나요.

" 가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가, 세계 전체가 인류 단위에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물질에너지를 많이 파낸다고 될 게 아닙니다. 생명에너지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에너지는 확산에너지입니다. 그걸 폭발시켜서 에너지를 얻는데, 효율성이 20%도 안 됩니다. 나머지는 전부 낭비되는데 그것이 공기와 물과 땅을 오염시키는 주범입니다. 생명에너지는 응집에너지입니다. 물이 흐르면서 자기를 정화하면서 수력발전도 하고 들도 적시고 하면서 많은 생명체를 길러내듯이, 응집에너지인 생명에너지를 이용해서 살길을 찾을 때만 오염을 막을 수 있고 다른 생명체와 공생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런 생명에너지를 만나고 활용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농촌입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출판사와 문턱 없는 밥집 등을 도시에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도시에서 어정대고 있는 까닭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ꡐ문턱 없는 밥집ꡑ과 ꡐ기분 좋은 가게ꡑ ꡐ민족의학연구원ꡑ 때문입니다. 좀 전에 건강한 도농연대 얘기를 했는데, ꡐ노농연대ꡑ가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노동자들의 삶이 점점 팍팍해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생산직 노동자들은 거의 숨도 못 쉴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을 잃어가고 있어요. 그러면 건강하게 유기농을 짓는 농민들이 가장 힘겹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줘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밥집이 할 일이 많다고 봅니다."

문턱 없는 밥집이 노농연대의 고리라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농촌에서 유기농 하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단체들, 갸륵한 뜻을 가진 중산층 부녀들도 규격품만 찾습니다. 야채도 일정한 크기, 되도록 일손이 덜 가는 것만 찾아요. 생명공동체가 어떻게 그런 획일적인 규격품만 만들 수 있나요. 이렇게 되면 아주 열심히 일해서 청정한 유기농산물을 생산해도 규격에 맞지 않는 것은 버려진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밥집이 늘어나면 하나도 버리지 않고 눅은 값으로 음식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하면 건강한 음식문화가 확산될 수 있습니다. 밥집은 낮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형편상 돈을 내기 때문에 손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손실은 국가에서 보조해줘야 합니다. 밥집이 2년째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돼 있는데, 우리가 낸 세금이 올바르게 쓰이는 모범적 사례 아닙니까. 이렇게 일부는 보전 받고 일부는 유기농가들이 싼값으로 공급하거나 다른 곳에서 받지 않는 것을 그냥 보내거나 해서 운영하는 거지요. 저녁에는 제값을 내고 먹고 있기 때문에 그 수익으로 인천 계양에 2호점이 생겼습니다. 명진스님, 수경스님, 도법스님 등 뜻 있는 분들이 빨리 3호점, 4호점을 내서 노농공동체를 형성하는 징검다리가 돼야 합니다."

노농공동체가 형성되지 않으면 어떤 혁명도 불가능

상당히 참신한 도농연대, 노농연대 방식인데요.

"나중에 노동자들이 해고를 당하면 염려하지 마, 우리가 쌀 대주고 채소 대주면 될 거 아니냐, 정 먹고살기 힘들면 내려와, 애들 교육도 걱정하지 마, 그것 때문에 변산공동체가 있고, 대안학교가 있는 거 아니냐는 거지요. 러시아에서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노․농․병사 소비에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농민이 다수였고 노동자가 소수였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은 대부분 농민의 자식이었구요. 이 3자들 간에 연대가 됐기 때문에 혁명이 가능했던 겁니다. 요즘 진보정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혁명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도 말 잘해서 의사당에 사람들 많이 보내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데, 그거 백일몽 꾸는 겁니다. 노농공동체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어떤 혁명도, 변혁도 불가능합니다."

변산공동체의 운영을 보면 정착공동체가 아니라, 옆 마을로 가기도 하고 몇 년 있다가 도시로 돌아가기도 하더군요. 학교도 그렇고. 이걸 도농 순환을 위한 열린 공동체라 해도 좋은가요.

"변산공동체는 종교나 이념공동체가 아닌 생활공동체입니다. 아마 생태적 공생주의가 가장 가까운 말일 겁니다. 실제 마르크스나 레닌 시대에는 하나뿐인 지구라는 의식이 없었고, 생명계 전체가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가 무한한 인간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낙관주의에서 출발했습니다. 잠자고 있는 물질에너지를 일깨워서 생산에 이용하면 인류가 지상천국을 이룰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점점 물질에너지에 속박되고 있지 않나요? 물질에너지 체계에 교란이 일어나거나 전쟁이 일어나 단전․단수가 되면 도시 사람들은 사흘도 못 버팁니다. 전부 폭도가 돼서 농촌공동체로 쳐들어와 먹을 것, 잠자리 내놓으라고 야단을 칠 겁니다. 그 끔직한 짐승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도시와 농촌이 자꾸 오가면서 결합해야 합니다."

생태적 공생주의라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엔 거의 공산주의던데요(웃음). 같이 토론하고 결정하고, 함께 노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용돈, 차비도 마을 공동기금에서 주는 것 보니까.

"하하하. 힘 닿는 대로 일하고 자기가 필요한 만큼 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을 위해서 서로 돕고 배려하는 그런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물질적 생산만 중시하거나, 생산물을 골고루 분배하는 것만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공산주의는 오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하시는 일도 다방면에 걸쳐 있습니다만, 새해에는 또 어떤 일을 구상하고 계신지 궁금한데요.

"이 일이 끝나면 저는 루퍼트 머독보다 더 큰 신문재벌이 될 꿈을 꾸고 있습니다. 요새는 촌스러운 차림이나 제목이 유행이라니까 《영세중립통일조국100원신문》을 만들어서 주 5일 발간하고 100원씩만 받을 생각입니다. 전국판, 시․군․구판, 각급 학교별 신문 등 문어발식 신문재벌을 만들 겁니다."

요즘 추세대로라면 방송도 겸영하셔야지요(웃음).

" 방송은 백낙청 선생이 하는 그런 방송(시민방송 RTV)을 몇 개 접수하면 되겠지요. 그렇게 해서 국민들이 즐겁게 보고, 마음껏 욕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30분 내에 전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방송, 우리끼리는 서로 깔깔대며 웃고 저 놈들이 보면 기분 나빠 할 방송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전에는 황석영이 소설 쓰고, 고은 선생이 시 쓰니까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제 나도 경험이 쌓일 만큼 쌓이고, 고통도 겪을 만큼 겪었으니까 가능하면 나도 소설도 쓰고 시도 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기대가 되는데요. 혹시 구상하고 계신 내용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소설 3부작을 구상하고 있어요. 제목은 세계 제3차대전입니다. 미국, 그 다음엔 일본, 한반도가 무대가 될 겁니다. 처음엔 미국의 내란입니다. 왜 내란이냐 하면, 만약 다시 1, 2차 세계대전처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인류뿐만 아니라 생명체 전체가 절멸됩니다. 핵무기, 최첨단 무기들이 국경을 까마귀 떼처럼 날아다니면 살아남을 생명체가 없습니다. 지금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가 미국입니다. 전쟁광들이 지배계층에 가장 많이 밀집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가서 내란을 일으켜야 합니다. 제 나라, 제 국민을 상대하는데 대량살상무기나 핵무기를 못 쓸 거거든. 멕시코 농민군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그랬죠. ꡐ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ꡑ라고. 내란 형태로 전쟁이 일어나게 될 때는 말이 최첨단 무기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략사령본부에 어떤 사람이 우리 측 고문으로 앉느냐? 하워드 진이나 노엄 촘스키 같은 사람이 앉게 됩니다. 그리고 전 세계 무예의 고수들이 각 진영에 포진하게 됩니다. 자금확보는 월스트리트를 말아먹을 나이지리아 금융사기단을 데려오면 최곱니다."

허허 허…. 그저 우스개 소리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이 책이 나오면 스웨덴 한림원에서 대량살상무기를 평화의 무기로 바꾼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문학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고 노벨문학상 받으라는 제의가 올 겁니다. 문학상은 석영이 하고 고은 선생이 오래 기다렸는데 그들에게 양보하고, 평화상은 오바마에게 주는 놈들한테 내가 받겠냐고, 거부할 작정입니다(웃음)."

앞서 말씀하셨지만 교육현실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도농공동체처럼 대안학교와 제도교육이 유기적으로 연계되고, 교사와 학생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도시에서도 아이들이 놀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치유는 어렵습니다. 놀이가 일의 예비과정이니까 마을공동체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놀아야 합니다. 바람, 산, 들, 햇빛, 풀과 짐승, 나무와 함께 놀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자연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고 거기서 삶의 보람을 느낄 줄 압니다. 만일 세상이 좋아져서 저 같은 늙은이에게 온 국민의 교육을 맡기고 간섭하지 않는다면 대안이 있습니다. 도시의 아이들을 여름방학, 겨울방학 이용해서 죄다 해변과 산골, 들에 가서 한 달 내내 놀면 제일 안전하고 활기차집니다. 일부러 주입식으로 하지 않아도 그 과정에 저절로 탐구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자료가 될 만한 좋은 책들 뒤져보고 하면 살아있는 아이들로 바뀔 수 있습니다."

변산공동체학교에서도 그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그렇습니다. 전에는 계절학기 재원마련을 위해 도시에서 오는 아이들에게 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도시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여름학교를 무료로 엽니다. 앞으로는 교사들과 연계한 교육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교조는 학부모, 교육관료, 학생들로부터 3면 협공을 당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보충학습이다, 자율학습이다 해서 계속 아이들을 묶어 놓다 보니까 아이들은 교사를 교사로 보지 않습니다, 간수로 보지. 우선 학부모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학부모 말이라면 교육관료들도 꼼짝 못합니다. 학부모와 연대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제대로 된 의식을 일깨워 줘야 하는데, 《개똥이네 놀이터》를 통해서 작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삼척에 있는 주순영 선생이 학부모들과 함께 ꡐ모듬일기ꡑ 쓰는 운동을 하면서 탄탄한 학부모교사연대를 꾸리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속 나오고 여기에 전교조 교사들이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생산적인 대안을 여러 곳에서 만들어내야 합니다."

눈길을 통일운동 쪽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교착상태, 아니 퇴행을 면치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저는 거꾸로 봅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열어 놓은 철길을 비롯한 통로는 그 어떤 극보수 세력도 막지 못합니다. 지금의 어려움은 단지 표면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평화체제, 곧 들어섭니다. 극우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빨갱이'라고 하는데, 그분들 또한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이 한 사회, 혹은 민족이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좌우가 함께 공존해야 합니다. 분분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우리 민족은 좌우로 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나라도 한반도의 남과 북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전쟁 위협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70이 넘은 일부 노인층에서 극단적인 말을 하고 있지만, 이런 사람들이 나서서 거대한 통일의 흐름을 막을 수 있다? 어림없는 얘기예요."

교실에서 탈출하라! 변산으로 가출하라!

그렇긴 합니다만,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일을 도모하기는 어려워도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 일으키기는 쉬운 게 세상 이치라….

"이 정부도 수구세력 눈치보느라고 그렇지 현재 상황이 오래 가지는 않을 겁니다. 대기업도 북녘에 있는 양질의 노동력이 아니면 돌파구가 없는데 현재의 긴장상태를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고향이 북녘이라서 대북사업에 특별히 애착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 대기업으로서 북이 열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었기 때문에 남보다 먼저 길을 연 것입니다. 삼성이든 누구든 내심으로는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 현대가의 마름 출신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마름이 보는 세계와 주인이 보는 세계는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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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입니다. 여론조사를 봐도 그렇고, 교육현장의 목소리를 들어 봐도 그렇고, 우리도 살기 어려운데 손해 보는 통일을 왜 하느냐는 생각을 가진 청소년들이 많다고 합니다.

"박정희 시대에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그럴 듯한 말로 학생들을 세뇌하고, 북에는 나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처럼 강요했지만, 보십시오. 대학에 가면 6개월도 지나기 전에 의식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 엄혹한 탄압국면을 겪으면서도 민주화 장정을 해왔고, 그 결과 비록 온건한 우파 정부이기는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지 않았습니까. 386이 짱돌 들고 싸움만 하다 보니까 공부도 게을리 했고, 게다가 국정운영 능력도 없이 폼만 재다가 놓쳤는데, 저는 좋은 시련이라고 봅니다. 이런 시련이 앞으로 5년 더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다져지는 겁니다. 한반도에 사는 동포들 모두 식민지시대로부터 따지면 100년 가까이 엄청난 시련을 겪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단련된 체질이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머리가 흔들린다고 해서 근간이 흔들린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들을수록 사람의 본성, 역사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걸 느낍니다. 어디서 이런 열정과 아이디어가 샘솟는지 궁금해지는데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도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제도교육을 받았던 형들을 여섯이나 6․25때 잃고 나서, 밑으로 셋은 일자무식의 농사꾼을 만들겠다고 결심하시는 바람에 4년 동안 초등학교에 못 다녔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제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줬습니다. 중학교 때는 계속해서 가출을 했지요. 제도교육의 입장에서는 적응하지 못한 불량학생이었지만, 제 나름으로는 삶의 길을 찾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평생 삶의 생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교실에서 빨리 탈출해라, 제도교육에서부터 탈출해라, 정 오갈 데가 없으면 변산으로 가출해라, 변산공동체학교에 와서 마음껏 놀아라, 그래야 나라가 제대로 된다, 나를 봐라! 우하하하!"

윤구병 선생은 우리 잡지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뿌리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을 역임했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 좋고 열매가 풍성하나니'라는 구절처럼 그가 불굴의 의지와 맨 손으로 일군 변산공동체가 '생명공동체'라는 열매를 맺게 할 억센 뿌리의 하나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때로는 진지한 철학자의 눈빛으로, 때로는 걸쭉한 농담으로 툭툭 내던지는 윤구병 선생의 이야기가 천근의 무게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놀고'있기 때문이리라. 손발과 몸으로, 그리고 치열한 정신으로.


월간 <민족21> 2010년 1월호 '동행동감'




보리

보리 2010-06-15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수익이 나면 다시 책과 교육에 되돌리자. 보리출판사의 출판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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