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출판사 블로그

"보리 마주 이야기" 갈래 글122 건

닫기/열기

7.jpg


임길택 선생님 우리 곁을 떠나간 지 어느덧 13년,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던 탄광마을은 폐광이 되어 빈집들만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이 힘차게 뛰던 학교엔 텅 빈 건물과 무너져가는 교문의 기둥만 남아 있어요.

골목길 돌고 돌아 산과 맞닿는 곳
앉은뱅이 두 칸 방 우리 집까지
하느님은 걸어 오실까요

'아버지 걸으시는 길을'에서

까만 물이 흐르던 그 작은 개울은 푸른 물이 되고 그 옆으로 길옆에 붙은 작은 집들이 예쩐에 양철을 이어서 누덕누덕 기운 그 모습 그대로 빈집에 그나마 몸 붙일 곳 없는 사람들이 찾아들어 가난한 살림을 하고 있더군요. 임길택 선생님은 일찍이 탄광마을로 자청하고 들어가 그곳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결혼을 하고 '울밑'과 '빛이랑이'를 낳고 가난하고 행복한 살림을 시작했던 거죠.

임길택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게 언제였나.
83년도쯤 아마 안동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글쓰기 연수 때마다 이오덕 선생님 입에 오르내리는 임길택 선생님 이름만 들으면서 어떤 사람일까 보고 싶었죠. 드디어 몇 년 만에 이오덕 선생니모가 함께 하는 글쓰기 연수에서 넋 빠진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앉아서 경청하는 모습을 본 게 처음이었어요. 멀리서 바라보기에도 참 바보스러운 얼굴이어서 좀 놀랍고 신기했죠. '아, 사람이 훌륭하려면 저렇게 생겨야 되는구나. 적어도 잘생기도 윤기 난 얼굴은 아니어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뭘 모르는 내 가슴속에 삭이 텄나고나 할까요.

그 뒤에 임길택 선생님을 만나면 늘 환하게 웃거나 진지한 얼굴이었습니다. 화를 내고 슬퍼하는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나중에 병들어 아플 때에도 그랬습니다. 잔기침이 한사코 멈추지 않는데도,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고 마치 별일 없는 사람처럼 찾아간 우리 부부를 대해 주었지요. 그 모습이 제겐 마지막이었습니다.

나한테는 다정하고 유쾌한 오빠 같은 사람. 뭐든, 애들하고 부르는 노래나 춤이나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배우는 오빠 선생님이었지요. 자기가 아는 건 열심히 가르쳐 주었죠.

"이렇게 하니까 한글을 전혀 모르는 애도 알 수 있더라, 이렇게 하면 아이가 글을 읽더라... 나는 여전히 애들한테 수학 못 푼다고 소리치고 청소 못 한다고 소리치는 선생이야." 이런 말들을 하던.

그런데 임길택 선생님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나요. 그 마음이 너무나 곱고 간절해요.

꽃봉오리 아니어도 좋아요
꽃술이 아니어도 좋아요
잎 끄트머리 가시 하나
흙에 묻혀든 실뿌리 하나
그 어느 것으로라도 내가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꽃술이 아니어도 좋아요
꽃봉오리 아니어도 좋아요. ('엉겅퀴')

우린 이 노래를, 모일 때마다 하도 많이 불러서 노래로 더 가슴에 담긴 시이죠.

처음에 이 시를 읽었을 때가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직후였어요. 그래서 차마 읽기가 힘들었던 아름다운 이 시를 노래로 부르니까 괜찮아요. 노래는 부를 만했어요. 노래로 하면 선생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요. 그래서 우린 모이면 이 노래를 기타와 함께 때로는 손잡고 때로는 어깨동무하고 부르죠. 임길택 선생님 사모하는 마음을 한목소리로 모아서.

임길택 선생님 시 '아버지 걸으시는 길'을 가지고 만든 노래 '막장'도 마찬가지에요. 5년 전 여름, 강화에서 전국의 '글과 그림' 선생님드로가 그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날, 처음으로 이 노래 악보를 주고 함께 부르자 했어요. 황금성 선생님이 북을 잡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홍경남 선생님이 선창을 했지요. 백창우님이 만든 악보를 미리 구해서는 맘대로 여럿이 불러 제친 거지요.

한밤중~ 라면 두 개 싸들고
막장까지 가야 하는 아버지 길에
하느님으은 정말로
함께 하실까요오

임길택 시, 백창우 곡 '막장'에서

우리들은 오랜만에 만나 술을 들고 나면 꼭 이 노래를 불러요. 우리에겐 너무나 가슴에 새겨진 이 노래들이 이제 음반으로 나온다니 참 기대되네요. 몰랐어요. 아직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노래라는 것을.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음안나 할머니도 피아노를 치면서 이 노래를 즐겨 부르셨어요. 할머니 피아노 반주에 내가 바이올린으로 멜로디를 연주하기도 했고요. 이렇게 노래와 함께 하면 임길택 선생님이 옆에 함께 있는 것 같고 환한 웃는 얼굴이 늘 떠오르죠.

그리고 아이들에게 한결같았던 그 마음을 나도 가져야지 하는 다짐을 늘 한답니다.

'아침 숲'도 마찬가지에요.
맘 좋은 백창우 아저씨는 노래를 좋아하는 저에게 악보를 아낌없이 내주십니다. 강화에서 우리 바이었던 3학년 아이들이 이 노래를 제일 좋아했어요. 날마낟 이 노래 부르고, 여러 학교가 모인 발표회 할 때에도 무대에서 나뭇잎을 흔들면서 이 노래를 불렀지요. 그 노래가 이제야 발표되는 줄을 며칠 전에 알았답니다.

아기를 안고 아침 숲에 들어가 보셨나요? 강화에서 저는 막내딸을 낳고 햇살이 조용히 내리쬐는 아침 고용한 시간에 아기를 안고 집 앞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항상 아기는 환한 얼굴로 두 손을 번쩍 하늘로 들었어요. 신기하지요? 나는 집에서 쉬면서 아기를 강보에 싸안고서 날마다 앞마당으로 나가던 그 기억이 나요, 아기와 나는 날마나 그 행복한 시간을 놓치지 않았어요. 그 아기가 지금은 열 살 여자애가 되어 기억도 못 하지만요.

나무들이
조용히 하늘 우러르는
아침 숲을 보세요. 보세요.
온 동네 아직 잠들어 있고
그 위로 햇살만 빛날 때
나무 저희끼리 손을 잡고
나무 저희끼리 몸 부비며
그 햇살 아래 달려 나온
아침 숲을 보세요.

(임길택 시. 백창우 작곡 '아침 숲'에서)

우리 식구들은 몇 해 전에 벗이 좋아 이곳 강원도 양양 산골로 이사를 왔답니다. 동해 바다에서 설악산 쪽으로 들어오면 대청봉 아래 조용하고 깨끗한 마을이에요. 오늘, 봄 날씨가 모처럼 따스해 자전거를 타고 윗마을 진전사로 갔어요. 왕초보니까 자전거를 끌고 갔다는 편이 더 맞겠네요. 한참을 올라가다가 오르막이 가팔라지는 지점에 마침 계곡 물가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기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내려가 보았어요.

설악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모은 진전사 저수지 물과 계곡이 만나는 곳에서, 폭포를 이뤄 하얀 거품을 내며 흐르고 있었어요. 잠시 땀을 식히며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과 바람과 나무와 물이 주는 선물을 가슴에 듬뿍 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죠.
폭포수가 연못을 지나 바위를 거쳐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임길택 선생님이 처음 아이들과 만난 곳 정선의 임계를 떠올렸어요.
4년 전 가을, 임계를 찾아가니 맑은 물이 끝없이 흐르는 개울을 따라 길이 있고, 그 끝에 마을과 학교가 있더군요. 임길택 선생님은 임계의 맑은 물이 흐르는 그 마을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그곳에 집짓고 살고파서 각시 손을 잡고 숲속을 헤매곤 했답니다. 그 학교를 알뜰히 살피던 수위아저씨는 지금도 그 마을을 지키며, 아이들을 다 키워 아들 손자며느리와 함께 살고 계신데, 지금도 청년 임길택 선생은 생생히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학교 일을 함께 하며 얼마나 돈독하게 한식구로 지냈는지 금방 알 수 있었어요. 임길택 선생 각시였던 채진숙님을 보더니 두 내외가 버선발로 달려 나와 얼싸안고 맞이했어요. 서로 그간의 소식을 묻고, 아이들 이야기로 이어졌지요. 그 집에서 정성껏 차린 저녁상을 먹고 나와 정선 시장에 들렀을 때도 깜짝 놀랐어요. 세월이 흘렀는데도, 임 선생님네 반찬거리를 사러 늘 다니던 그 가겟집 사람들이 채진숙님을 친누이 맞듯 반갑게 달려 나왔어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데도, 그분들은 임 선생을 너무나 그리워해요. 학교 아이들과 부모님들, 그리고 이웃 분들 한 분 한 분과 가족처럼 지냈던 임 선생 덕택에 가는 곳마나 따뜻한 대접을 받았어요.

임 선생님 정선 다음으로 일했던 사북의 탄광마을은, 지금은 모두 떠나고 빈집만 남아 있었어요. 아, 정말 개울가의 그 양철집은 방이고 부엌이고 정말 손바닥만 해요. 여기서 세 식구가 어찌 누웠을꼬. 이곳에서 행복을 일구며 살았던 말인가! 그렇게 지내던 조그만 산골학교에서 전국교사마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힘들께 지내던 임 선생은, 온 가족이 거창으로 내려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어요.

거창 샛별초등학교의 주중식 선생을 벗으로 함께 지내고파 보따리를 쌌던 임길택 선생님은 거창의 산골 오두막 두곡산방에서 농사지으며 혼자 사는 해광스님도 자주 찾아갔지요. 함께 공양도 나가자하고, 군불 가난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스님 방을 그렇게 좋아했다는 임길택 선생님. 뒤늦게 해광스님은 우리들하고도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답니다. 임길택 선생님이 폐암에 걸려 아프고 나서는 끝내 연락이 안 닿아 한 번도 못보고 세상을 떠난 일을 스님은 지금도 못내 아쉬워합니다.

몇 해 전, 함께 지내던 '두곡'에 임길택 시비를 예쁘게 만들어 세웠어요. 지난주에 해광스님이 머무는 그 작은 두곡산방에 호롱불을 켜고 우리는 다시 모여 앉았어요. 스님이 정성껏 준비하신 시래기된장국과 나물들, 물김치에 잡곡밥을 맛나게 먹고, 효소 술 한 잔씩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정겨운 노래를 함께 불렀죠. 밖에 달밫이 얼마나 황홀하게 밝은지. 추위도 아랑곳 않고 다들 마당에서 서서 달을 바라보며 노래했어요.

꽃피는 봄 사월에 다곡산방의 아침은 새소리로 시작하고 키 작은 민들레 제비꽃 꽃다지가 발에 밟혀 걷기가 힘들어요.
스님의 빨래터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옆으로, 이끼들이 융단처럼 깔려 맨발로 다녀도 아주 좋아요. 그 융단 위 키 작은 빨랫줄에는 색색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어요. 뭐든 스님 손에 닿으면 다 예뻐요. 그 때 심었던 화살나무, 오동나무는 햇빛을 잘 받아 아주 멋지게 커서 마당에 그늘을 만들었어요. 우리는 그늘 아래서 진달래꽃을 따다가 화전놀이를 하며 봄노래를 불렀어요.

임길택 시비에서 술도 따르고 절도 하고 '엉겅퀴'도 부르고, '막장'도 부르고, '개구리'도 '아침 숲'도 오랜만에 불렀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온 산천에 산벚꽃과 연둣빛 나뭇잎들이 어우러져 우리들 가슴속에 행복이 가득했답니다.
문경을 지날 떄, '꽃 폭탄이야, 꽃 폭탄!" 이라고 채진숙님이 소리쳤어요. 문경을 넘어설 때는 활짝 핀 산벚꽃나무가 산에 가득했어요. 산 전체가 환한 꽃으로 불꽃 놀이하는 듯, 임길택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주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생각했어요.

동네 노인들이나 아이들이나 늘 힘없는 사람이 보이면 곁에 가서, 온 정성을 쏟아 힘을 주던 임 선생님이이니까. 집으로 돌아오며넛 힘이 많이 빠져있던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힘이 막 솟아오르는 걸 느꼈어요.

임길택 선생님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어서 행복해요.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와 함께 노래 속에 살아 숨 쉬니 이보다 좋고 다행스런 일이 어디 있겠어요.




6.jpg

보리

보리 2010-06-14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수익이 나면 다시 책과 교육에 되돌리자. 보리출판사의 출판 정신입니다.

댓글을 남겨주세요

※ 로그인 후 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