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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는 노동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처럼 여러 가지 기념일이 있다. 기념일이 많은 게 문제될 건 없다. 저마다 자기가 챙겨야 할 기념일을 처지에 맞게 기념하면 되니까. 그러나 처음에 이런 기념일들을 만들었던 뜻이 왜곡되거나 아예 다르게 바뀌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스승의 날은 충청도에 있는 어느 여학교 학생들이 편찮으신 담임 선생님 병문안을 다녀간 일이 기사로 나면서 시작되었다. 요즘은 스승의 날이 촌지나 선물로 얼룩지면서 오히려 교사들한테 부끄러운 날이 되고 있다.

어린이날이 이런 모습이라면 굳이 나라에서 쉬는 날로 정한 까닭이 없다

어린이날도 마찬가지로 볼썽사납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온갖 장사꾼들이 무얼 팔아먹기에 바쁜 날이 되었다. 선물이랍시고 속없이 비싸기만 한 물건이나 겉보기에만 화려한 행사가 판치고 있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들한테 선물 사 주고, 기계가 잔뜩 들어찬 놀이 공원에 가거나 외식쯤은 해야 하는 날로 생각하고 있다. 어린이날이 이런 모습이라면 굳이 나라에서 쉬는 날로 정한 까닭이 없다. 보통 때 아들딸 손목 잡고 놀이 공원 한번 가기 어려운 집에서는 일 년에 하루쯤 신나게 놀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집 부모나 어린이한테는 더욱 마음 아픈 날이 바로 '어린이날'이다. 정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다니는 일터는 5월 5일 같은 빨간 날에도 쉬지 않는 곳이 더 많다. 우리 둘레를 잘 살펴보면 어린이날에 더 슬픈 어린이들이 결코 적지 않다.

어찌 되었든 요즘 어린이날은 '어린이를 위해 돈을 많이 쓰는 날'이 되어 버린 것부터가 슬픈 일이다. 돈 버는 데 눈먼 장삿꾼들이 이런 사회 분위기를 부채질하고, 방정환을 비롯한 1920년대 소년운동가들이 왜 어린이날을 만들었는지 읹어버린 어른들이 여기에 놀아나고 있다. 올해로 어린이날이 88회를 맞는데, 1920년대에 어린이날을 만든 까닭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역사를 기억하고 지켜 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안타깝게도 거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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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이 제정한 '어린이 날'을 보도한 동아일보(1923년 5월1일)
<그림 출처 : 남양주 투데이>


그렇다면 88년 전에 어린이 운동가들이 어린이날을 처음 만든 까닭과 그이들이 어린이날에 담은 처음 정신은 무엇일까? 제 1회 어린이날 행사는 1923년 5월 1일 오후 3시에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 수운 회관에서 있었다. 5월 1일은 노동자의 날이다. 당시 어린이 운동가들은 어린이도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억압받는 민중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어린이날 행사를 '노동자의 날'에 같이 잡았다. 그래서 오전에는 아이들도 노동자의 날 행사에 참여하고, 오후에 다시 모여서 어린이들이 참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위한 요구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날 서울 종로 거리와 온 나라에 뿌린 선언문이 20만 장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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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일 어린이날 포스터
<그림 출처 : 도깨비뉴스>


어린이를 위한 최초 선언문 (1923년 5월 1일 발표)

소년운동의 기초 조건
·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다.
·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절을 행하게 하라.

어른들에게
·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 보아 주시오.
· 어린이를 가까이 하시어 자주 이야기하여 주시오.
·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 산보와 원족 같은 것을 가끔가끔 시켜 주시오.
·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일러 주시오.
·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한 놀이터와 기계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末梢)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어린 동무들에게
·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 어른들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버리지 말기로 합시다.
·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들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 입을 꼭 다물고 몸을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선언문에서는 어린이 운동이 나아갈 방향으로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과 사회 시설'을 밝히고 있다. 방정환은 조선 민중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민중이 어린 민중이라고 했다. 식민 지배 아래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부모로 둔 데다가 그 부모한테 또 억압을 받으니 이중으로 억압받는 민중이라는 것이다. 그때 어린이 운동가들은 억눌린 어린 민중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외쳤다. 어린이날이 처음 시작된 날, 오후 3시에 어린이와 어른 1,000명이 모여서 어린이날을 널리 알리고 수운 회관에서 광화문까지 행진했다. 손에는 흰 바탕에 붉은 글씨로 '어린이 해방'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250명씩 네 모둠으로 나뉘어 걸었다. 이것이 첫 번째 어린이날 모습이고, 이날 외친 말이 어린이날에 깃든 정신이다.

선언문에서 말한 '재래의 윤리적 압박'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봉건 윤리를 말한다. 이것은 어른이 편하고자 만들어 놓은 규범이다. '윤리적 압박'은 지금 다 없어졌는가? 조금도 그렇지 않다. 어린이들은 부모들이 요구하는 규범에 묵여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을 오가면서 공부에 시달려야 한다. 규범 속 내용만 다를 뿐이지, 20년대보다 훨씬 더 강하고 끈질기게 아이들을 짓누른다. 요즘 어린이들이 인격을 존중받는다고는 볼 수 없다. 그들은 오직 성공하려고 공부하는 기계로 여겨질 뿐이다. 또 방송매체와 온라인 게임에 매여 어른들 돈벌이 대상, 기계에 얽매인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오죽하면 의무교육 현장에서 모든 어린이들한테 점심 한 그릇도 공짜로 주지 못하고, 가난한 아이들만 따로 몰래 주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경제적 압박'에서는 어린이들이 모두 벗어났는가?
역시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14세가 안 된 아이들한테 시키는 강제 노동은 거의 없어졌다지만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특히 성폭력에 시달리거나 매매춘 올가미에 빠진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정에서는 자녀 교육에 쓰는 비율이 한없이 높아지고 있는데도 정부가 예산을 짜고 운용하는 것을 보면 어린이한테 들어가는 비율이 아직도 턱없이 낮다. 선거 때마다 학교 교육 예산을 높이겠다고 큰소리쳤으면서도 아직 지엔피(GNP, 국민총생산) 5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오죽하면 의무교육 현장에서 모든 어린이들한테 점심 한 그릇도 공짜로 주지 못하고, 가난한 아이들만 따로 몰래 주어야 하는가? 어린 아이들한테 나라에서 따스한 밥 한 그릇 떳떳하게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시설'은 되어 있는가?
역시 그렇지 못하다. 학교 교실이 고요히 배울 만하게 되어 있지 않다. 지금도 교사들은 온갖 행사와 다른 일에 시달리느라 오직 아이들만 생각하며 가르치는 것이 어렵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늘어난 온갖 잡무 때문에 더 어수선하고 힘들다고 한다. 어린이들이 고요히 놀면서 배울 수 있는 지역 사회 시설도 턱없이 모자라다.

21세기 88년 전 어린이 운동가들이 어린이날을 만들며 새겼던 마음과 정신이 꼭 필요한 시대다. 물론 많이 바뀐 시대에 맞게 말을 바꾸고, 빼거나 더 넣어야 할 내용도 있다. 하지만 우리 겨레가 가장 어려웠던 때인 항일 독립 투쟁기에 방정환 선생님과 수많은 소년운동가들이 외친 그 본뜻과 정신만은 그대로 되살려야 한다. 어린이날이 참된 '어린이날'이 되는 길, 그 길이 우리 겨레가 살아날 길이다.

이주영
서울 마포초등학교 교감.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계간 <어린이 문학>을 편집하고 있다.


<개똥이네 집>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보리

보리 201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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