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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공동체" 갈래 글17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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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림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쓰레기를 버리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변산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쓰레기를 정리해 두고 재활용여부를 가려서 분리해 두는 곳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곳을 '쓰레기 분리수거장'이라고 하지만 우리들은 '되살림터'라고 부르낟. 되살림... 그 생명이 다 하고 쓰임새가 다 하여 더러운 존재로 하찮게 버려진 것들을 다시 살아나도록 한다는 뜻이다.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저분한 쓰레기장의 이름이 되살림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생명이라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6년 동안 직업군인(부사관)으로 모 군단의 기무대 소속의 보안실무자였고, 정보감찰관으로 복무했다.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은 늘 사람들의 손과 발을 묶고 입과 귀를 막았으며 그들을 뒷조사하여 잘못을 지적하고 처벌하는 것이었다. 내게 있어 그러한 일들은 항상 스트레스였고 고민거리였다. 언제나 내 마음은 묶인 것을 풀고 막힌 곳을 뚫으며 주변의 이웃들과 마음을 열어 함께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과 마음을 이유로 나는 주변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 생활을 마감했다. 전역 후에 여행도 하고 '음성 꽃동네'와 '소록도 병원'에서 봉사활동도 했다. 그런 다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이곳 변산공동체를 알게 되어 살게 된 것이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나는 많이 긴장했다. 수년간의 군생활로 인해 나의 생각은 경직되어 있었고,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공동체 식구들의 수줍지만 개나리 같은 미소와 손길로 말미암아 굳어있던 나는 어느 새 따스함과 포근함으로 물들어 갔다.

변산공동체에서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부분은 사람을 위한 가르침(교육), 자연에 의한 생활(농사), 사람을 향한 소통(공동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젱 속의 교육, 편의에 따른 환경파괴, 나눔이 아닌 분리를 쫒는 개인주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공동체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이러한 아름다운 신비로 나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신명식

좋다, 싫다, 목마르다, 아우성은 들리지 않고
아침은 언제나 적막하다.

해를 타고 넘어오는 선 외로움
연기에 묻어 날아가지 않는 진 그리움.

겨울에 두 달 동안 경기도 집에 다녀왔습니다. 그간 온 사람 간 사람 공동체 구성원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큰 변화는 공동체에서 기르는 소 근영이가 예쁜 송아지를 한 마리 낳은 것입니다.
근영이가 사는 축사는 제 숙소 바로 옆이라 방을 들락거릴 떄 근영이가 저를 부르면 저도 그에 화답하며 "어이~"하고 대답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축사에 우두커니 있는 근영이 모습에 자라 해주지도 못하면서 미안한 마음만 키우고 있었지요.

새끼를 낳고 나서 우리의 인사는 달라졌습니다. 제가 보이면 근영이는 낮게 울며 새끼를 불러들이고 경계를 합니다. 저는 그 모습에 오히려 안심이 되어 웃습니다. 전처럼 인사하지는 않지만 서로 즐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위안도 잠시, 얼마 후엔 송아지를 다른 곳으로 보낸다고 합니ㅏㄷ. 분홍색 코를 문질러대던 새끼가 사라지고 나면 근영이는 축사에서 종일 혼자 무슨 생각을 할까요? 다시 '무우~'하며 나를 부를 근영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우리들의 인사는 다시 쓸쓸해질 것 같습니다.
김원봉

몸을 풀다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몸으로 일한 기억이 없다. 젊은 날 장정이라면 다들 한 번씩 겪어보았다는 공사판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도 없고, 대학 시절 그 흔했던 농활을 따라나선 적도 없다. 이삿날 짐 나르는 게 싫어 시험을 핑계로 아침밥 숟가락 놓기 바쁘게 달아났다면 이해가 쉽겠다. 대한민국 남자였으니 군대는 가지 않았겠느냐고? 안 갔다. 어찌어찌 운이 좋아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룰 때 나도 늘어지게 잤다. (나를 여태도 해병대나 특전사 출신으로 알고 있는 분들은 모쪼록 젊은 날 술자리 뻥이야 으레 그러려니 하시길 ^.^;; ) 아무려나 그토록 게이른 내가 몸 일 중에서도 가장 힘들다는 농사를 짓겠다고 변산공동체학교 한 귀퉁이에 새끼들까지 앞세우고 둥지를 틀었다.

시작이 심상치 않다. 캐릭터와 배경이 극단적으로 부딪치고 있으니 아마도 이 친구 엄청난 고초를 겪겠군, 하는 그림을 그리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송구하지만 그 그림 보기 좋게 빗나갔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내가, 아니 정확히는 내 몸이 이 생소한 상황에 잘 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름을 내고 집을 고치고 돌을 나르고 톱질 못질 삽질 외에도 온갖 몸질을 하면서 나는 내 몸에 경탄하고 있자. 진짜 농부들 눈으로 보자면야 남들 몫 반도 못하고 헉헉대는 어리삘삘한 얼치기겠지만, 수박을 일곱 개쯤 합친(여섯 갠가?) 크기의 돌을 번쩍번쩍 들고, 삽질을 일곱 시간 동안 쉼 없이 하는 (일곱 번인가? 암튼 그런 거 따지면 쩨쩨해 집니다.) 내 몸이 신통하기 그지없다. 내 몸에 쓸모 있는 근육과 힘줄과 뼈가 이렇게 많았단 말인가!

요컨데 몸이 풀리고 있다. 그동안 아낀답시고 외려 가두어 둔 꼴이 되어 버렸는데 , 이제 몸이 오라를 풀고 환호를 하고 있다. 근육이 뭉쳤다 풀어지고 힘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느슨해지는 동작을 되풀이 하면서 내 몸은 봄을 맞은 개구리처럼 약동한다. 몸이 제 입으로 들어갈 알곡을 몸소 가꾸고, 저 누일 공간을 직접 세우며, 저 두를 옷을 제 손으로 잘라 붙이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아챈 듯하다. 눈치 빠른 녀석 같으니.

몸은 꽃이 아니라 호미였다. 바르고 고치고 가꾸는 껍질이 아니라 스스로를 움직여 저 필요한 것들을 만드어내는 알맹이였다. 몸이 풀리니 정신까지 자유로워진다. 팍팍한 도시에서 하던 걱정들이 이젠 대수롭지 않다. 공동체의식이니 대안교육이니 하는 것도 사색과 담론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다 부질없는 짓거리였다. 그저 몸으로 부딪치고 볼 일이다. 나의 강건한 노동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한 끼 식사가 된다면, 그래서 알지 못하는 그에게 눈물 같은 위로가 된다면 거창한 담론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너와 내가 서로의 억센 호미를 겯고 그동안 살아온 수고를 헤아리며 살아가면 그 뿐.




2010년 3월
전북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 12-3
063)584-0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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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보리 201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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