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다 길을 가다
생명의 본성은 자신을 나누는 데서 시작 되었어요
농부 철학자‧보리출판사 대표 윤구병
철모를 때 결혼해서 일찍 엄마가 되었다. 주변에 아기를 낳은 친구가 하나도 없어 외로웠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많이 힘들었다. 그때 나를 위로한 것은 그림책이었다. 세 살 난 큰 딸 아이와 뱃속의 둘째와 함께 읽고 또 읽으며 놀던 ‘올챙이그림책’. 나는 그 중에서 <바위와 소나무>를 제일 좋아했다. 바위틈에 날아온 솔씨가 자라나자 바위가 부서지려고 한다. 그러자 “저리가. 이제 너랑 안 놀 테야.”라고 말하는 바위에게 아기 소나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망가뜨리는 게 아니야. 우리는 하나가 되고 있는 거야.”
아기 소나무는 마치 철없는 엄마를 다독이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났다. 바위가 솔씨를 품듯 생명을 길러내는 일이 온 우주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조근조근 이야기 해주는 책이었다. 올챙이그림책은 윤구병이 마흔여덟 살에 보리 기획이란 이름으로 만든 것이다.
뱃속의 둘째가 태어나 다시 올챙이그림책과 친구가 될 무렵, 내가 살고 있던 신도시가 너무 답답했다. 아이들이 겨우 흙을 만질 수 있는 아파트 놀이터의 모래밭은 절대 ‘솔씨’를 품을 수 없었다. 그 시절 어린 딸들과 함께 변산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아이들을 품어줄 바위와 소나무가 하나가 되는 땅을 찾고 있었고, 윤구병의 변산공동체는 “호기심에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이들을 되돌려 보낼 만큼 박대해가면서 농사꾼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고 말하던 때였다.
그때 국립대학교 철학과 정교수 자리를 버리고 막 농사꾼이 된 오십대 중반의 그이는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조금 강팍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 무렵 <잡초는 없다>에서 들려주는 그의 시골살이는 희망이었다. 윤구병은 IMF구제금융사태로 어수선하던 세상을 등지고, 시골살이 한 해마다 비로소 철이 들어 한 살씩 새롭게 나이 먹어간다는 남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월든>이나 헬렌과 스콧 니어링 부부의 꿈이 먼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니라고, 말쑥한 양복 대신 밀짚모자에 고무신을 신은 그가 우리 앞에서 호미를 든 채로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잡초는 없다’고 말하는 그는, 우리가 기르는 풀만이 아니라 저절로 자라난 풀들과도 사이좋게 지내자고, 잡초를 적으로 바라보고 풀을 죽이는 제초제의 폭력 대신 풀로도 농사짓는 해법을 보여주었다. 그가 내어 준 산과 들의 백가지 약초들을 캐서 설탕에 재워 일 년 이상 발효시켰다는 효소의 새큼달큼함이 바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평화의 맛이지 싶었다.
그이처럼 제대로 나이 먹으며 철들고 싶었다. 그래서 철 따라 새로운 풀씨들이 날아와 뿌리를 내리는 흙 마당이 있는 곳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우리 순이 어디 가니> <바빠요 바빠>처럼 그가 시골살이를 통해 들려주는 새로운 그림책들과 함께 딸들이 자랐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그가 대표로 있는 보리출판사에서 나온 <첫아이 학교보내기><옛이야기 들려주기><살아 있는 그림 그리기><살아 있는 글쓰기><재미있는 숙제 신나는 아이들> 같은 책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보리출판사는 ‘나무 한 그루 베어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자’는 것을 목표로 ‘추운 겨울을 꿋꿋하게 이겨 내고, 가난한 이들에게 양식이 되어 주는 보리를 닮고 싶습니다’라고 했고, 나는 그 책들을 깊이 신뢰한 독자였다. 그러므로 책 밖에서 그를 만나러 가는 일이 얼마나 설렜겠는가.
서로 돕고 살리는 보리와 변산공동체 그리고 ‘문턱없는밥집’과 ‘기분좋은가게’
보리출판사가 있는 파주 출판단지가 아니라 서울 서교동에 있는 ‘기분좋은가게’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기증받은 물건들을 되살려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기분좋은 가게’는 유기농산물로 밥상을 차리는 ‘문턱없는밥집’과 나란히 붙어있다. 밥집을 찾은 사람은 형편껏 밥값을 내는 대신 고춧가루 한 점까지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변산공동체와 문턱없는밥집 그리고 기분좋은가게는 서로를 살리고 돕는 유기적인 관계다. 가게가 있는 태복빌딩에는 재단법인 민족의학연구원과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잡지 월간 <작은책>,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글씨기교육연구회 같은 단체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모두 윤구병의 숨결이 닿은 식구들이다. 보리출판사의 공익기금으로 빌딩을 마련했고, 지금은 민족의학연구원에 기증한 그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다. 출판사의 전신인 보리기획이 올챙이그림책을 만들게 된 것도 노동운동 현장에서 일하는 후배들을 돕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평범한 5층 건물이지만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남북의 어린이가 함께 볼 수 있는 책을 만들자. 수익이 나면 다시 책과 교육에 되돌리자.’는 보리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삭막한 도심 속 청보리밭 같은 공간이다.
기분좋은가게 한켠에 멍석을 깔고 널따란 통나무를 켜서 만든 다탁을 놓은 곳에 그와 마주 앉았다. 가게 이름처럼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얼굴, 참 편안했다. 멍석 앞에 가지런히 벗어 놓은 그의 흰 고무신처럼. 십 수 년만에 다시 본 그의 얼굴은 아이처럼 해맑았다. 문득 그가 <특집! 한창기> 책에 ‘뿌리깊은나무의 창간’에 대해 썼던 글이 생각났다. 첫 직장이 있던 으리으리한 삼일빌딩 바닥에는 푸른 융단이 깔려 있었는데 다들 구둣발로 밟고 다니는 걸 “황송해서” 맨발로 걸어다니기 좋아했다고 썼다. 윤구병은 그가 ‘열여섯 가지 금기를 무시하고 태어난 위험한 잡지’라고 회고했던 <뿌리깊은나무>의 초대 편집장이기도 했다. <살림이야기>와 만나기 직전에는 라디오 인터뷰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방송국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왔을 저 당당한 고무신과 융단 위를 활보하던 맨발의 청춘 시절이 떠오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비 때문에 유독 고생을 많이 했던 여름 한철을 보내고 났으니 변산의 농사가 안녕한지부터 물었다.
“콩밭이랑 생강밭 매다 올라 왔는데, 호미로 맬 걸 죄다 괭이로 했어요. 내 별명이 풀을 잘 매 풀매도사에요. 그런데도 너무 힘에 부치더라구요.”
비가 잦으니 풀들도 쓸려 내려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뿌리를 깊게 내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궁금했다. 똑같은 비를 맞아도 왜 유독 인간이 기른 작물들이 더 약할까. 숲과 들에 저절로 자라난 풀과 나무들은 비가 많이 왔다고 해서 뿌리가 썩거나 병이 들지는 않는다.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럴까요.
“사람 손을 탄 것은 다 약해요. 그래서 사람은 곡식과 가축이 서로 도와가며 살도록 구조를 만들어 놨어요. 사람도 살리고 곡식도 살리고 가축도 살려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잖아요.”
그리고는 사람 손을 너무 타면 심지어 사람도 제구실을 못하지 않느냐며 웃었다. 더불어 들판이 흉년이 들면 밤이랑 감, 꿀밤 같은 농사는 잘 된다며, 이런 나무들이 배고픔을 달래주기 때문에 ‘밥나무’라 부르는 것이라고도 했다. 오래전 그림책에서 들려주던 옛이야기들처럼 그의 말은 참 맛있었다.
변산공동체의 농사는 보통 제초제와 화학비료를 3년 이상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인준 기준보다 까다로운, 5무농법을 고집한다. 비닐은 물론이고 시장에서 파는 퇴비까지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기계 대신 생체에너지를 고집해 농사를 짓는다. 다섯 가지 인위적인 간섭이 없는 대신 사람과 풀과 작물과 가축이 서로를 돕고 살리도록 하는 농법이다.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16년 동안이나 그렇게 농사를 지었다는 그가 도시의 중년 사내들보다도 활기차 보였다.
그 16년이란 세월에 대해 물었다. 시골살이 햇수에 따라 비로소 철이 든다던 그의 셈법에 따르면 그는 열여섯 살이었다.
“시골에서 열여섯 살이면 어른 대접을 받아요. 장가가고 독립할 만큼 철든 거지.”
춘향이가 이몽룡과 뜨겁게 사랑한 이팔청춘도 열여섯 아니냐고 했다.
보리의 책과 함께 자란 딸들이 어느덧 열여덟, 열여섯 살이었다. 그를 만나러 오면서 열여섯 살 그이도 딸들처럼 질풍노도 사춘기의 한복판에 있는 것은 아닐까, 요새 일주일에 절반은 서울에서 지내고 나머지는 변산에 있다는 소식을 때문에도 혹시 공동체의 높은 뜻으로부터 지친 것은 아닐까 멋대로 추측했었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철모르는 내 생각이었다.
“그럼 철이 없지. 도시에선 맨 철없는 음식만 먹으니까.”
그가 껄껄 웃는다. 그러면서 “그런데 철들면 곧 죽는다잖아요”라고 덧붙인다. 실제로는 윤구병은 1943년생이다. 요즘은 ‘내일모레면 일흔이니 지금 당장 죽어도 자연사’인 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변산에서는 이미 ‘늙었다고 재너머로 쫓겨’난 신세라며 웃는다. 원래 절집에서도 ‘노스님들한테 상좌 두고 멀찌감치 뒷방에 모시는 것도 가까이 있으면 잔소리가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그가 일선에서 물러나도 아무 걱정 없을 만큼 변산공동체가 튼실하다는 자부심으로 들렸다. 다만 변산공동체를 뒷받침하던 보리출판사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시로 나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보리를 믿고 있던 30, 40대 부모들과 달리 요즘 젊은 엄마들은 신자유주의와 친자본화 물결에 깊숙이 물들어 있어요.”
출판사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유통자본의 힘이 커져 출판시장을 어지럽힌 탓도 있겠지만 부모들의 의식이 변한 이유도 크다고 그는 말했다.
준비 없이 엄마가 되고,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만 하던 때, 보리의 책들은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올챙이 그림책 속의 ‘솔씨’가 ‘바위’에게 서로를 살리며 하나 되자고 한 말은 아이가 경쟁에 뒤처지면 어쩌나 조바심이 일어날 때 크게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게 해주는 경구 같았다. 그러나 나도 아이들도 더 이상 그림책들을 보지 않게 된 시점부터 세상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백기를 들고 만 것은 아닌지 싶어 씁쓸했다.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는 어렵다는 지금도, 다시 희망이 보인다고 했다. 청년실업과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젊은이들이 각성하기 시작했다고. 나는 그 말이 불편했다. 고난이 닥쳐와야만 비로소 소중한 것을 깨닫는다니!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인가요,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낮에 평탄한 길을 걸을 때는 보폭도 일정하고 팔을 휘 젖는 손의 각도도 일정하지요. 그러면 몸에 자동화기제가 작동해요. 그렇게 습관이 되면 의식이 인체에 관여하지 않아요. 하지만 캄캄한 밤 산길을 걸을 때는 달라져요. 의식도 감각도 예민하게 깨어나요. 위기의 순간에 비로소 몸과 마음이 일치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집단화된 습관은 관습이 되고, 그 사회의 윤리나 도덕은 관습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조금 뜻밖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도 여자와 몸을 섞으면 육체의 아이를 낳지만 남자와 몸을 섞으면 정신의 아이를 낳는다 했을 정도로 고대 그리스에는 동성애가 만연했어요. 아테네제국주의로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이 집중되었을 때 일이에요.”
그곳에는 그 시대의 모순도 집중되어 있었다고 했다. 오늘날의 미국도 다르지 않다고.
“모든 생명은 자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요. 갯벌에 유조선이 침몰해 오염이 되면 소라나 게들의 암컷이 빠르게 수컷으로 전환한대요. 자발적 성전환으로 개체수를 줄여서라도 종의 생존을 이어가는 거지요.”
그의 말대로라면 경쟁이 치열하고 살기가 각박해진 도시문명이 잉태를 거부하는 동성애를 확산시키고 있는 셈이다. 젊은이들이 출산을 꺼리는 것도 세계사의 모순이 터질 듯 첨예해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류뿐 아니라 생명계 전체가 우리에게 미래가 있느냐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요.”
벌에 쏘이기라도 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잠시 그가 본래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를 ‘아테네의 등에’라 부르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인간 중심의 환경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이 급격히 늘어난 것 역시 생명 전체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목숨’에 대해 열띤 이야기를 이어갔다. 준비된 교안에 따라 강연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무와 우리는 목숨을 주고받는 관계지요. 목숨은 들숨과 날숨이 합쳐진 말인데, 우리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나무가 들이마셔서 생명활동을 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살 수밖에 없어요.”
아울러 도시문명을 지탱하는 물질에너지로 인류가 살아남는 데는 한계가 있고 지속가능한 미래는 오로지 생명에너지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생명의 원리에 따라 더불어 사는, 변산공동체같은 생태공동체가 농촌에 더 많이 늘어나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도시공동체는 파리꼼뮨 이후 성공한 것이 없어요. 농민과 함께 하지 않으면 모두가 다 망해요.”
그가 변산에 터를 잡기 시작한 1995년, 그 사이 공동체에서 아이들이 태어났고 학교가 세워졌다. 변산공동체학교는 현재 중고등 과정이 있는데 그가 앞으로 힘닿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이 산살림, 갯살림, 들살림학과가 있는 ‘살림대학’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의 계획 에 얽매여 연연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지금 이대로 목숨이 다한다고 해도 이미 감사한 나이라며 껄껄 웃었다. 그는 내년 초까지 출판사 살림을 다져놓고 다시 훨훨 자유인으로 돌아가기를 고대하고 있다. 공동체를 늘려가는 일이나 살림대학을 여는 일도 굳이 그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이루어 내리라 믿는듯했다. 공동체에서 성장한 또 다른 윤구병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소리로 들렸다.
실제로 변산공동체에서 분가해 이웃한 곳에 세포분열 하듯 새로운 공동체를 꾸려 나간 식구들이 여럿 있다. 그러나 그는 공동체 생활을 장밋빛이라고만 말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참 힘들어요. 하물며 하나님이란 막강한 ‘빽’이 있는 수도자들의 공동체도 종신서원을 할 때는 열 명 중 세 명이 겨우 남는다고 해요. 인위적인 공동체는 그렇게 힘이 들어요.”
그는 변산에 대해 ‘느슨한 생활공동체’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루 동안 할 농사일을 공유하고, 밥 먹는 시간만 정해져 있을 뿐, 사람이 만든 규율이 아니라 자연이 정한 시간과 계획이 공동체를 움직이고 있다고 해야 옳다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들고났지만 적어도 1년 넘게 공동체에서 산 사람은 다시 도시로는 돌아가지는 않았다는 사실만 자랑으로 내세울 뿐이다. 그리고 공동체가 분화해서 또 다른 공동체를 낳았듯이 생명의 본성은 나눔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오직 그이가 믿는 질긴 희망이었다.
“지구상의 생명체가 단세포 생물에서부터 출발하여,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는 긴 역사 과정을 밟아 왔다 칠 때, 자신을 나누어서 다세포로 발달한 것이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을 타자화 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혼자 살아남기 힘들었기 때문일 겁니다.-윤구병의 존재론 강의<있음과 없음> 중에서.”
사람들은 그가 정년이 보장된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변산으로 내려갔을 때 흔히 ‘철밥통’을 버린 용기와 결단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나는 거룩한 동기 같은 거 하나도 없어요. 그저 나 편하고 좋으려고 간 거야.”라며 천진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그는 진짜 철밥통은 오로지 자연과 함께 하는 삶 속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이다. 그곳에는 정리해고나 명예퇴직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보다 더 크고 위대한 자연은 더 많은 생명을 먹여 살리고 더 큰 잉여노동을 하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한 그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이야기는 그만하고 빨리 ‘행복한 물’을 마시러 가자는 그의 성화에 못 이겨 문턱없는밥집으로 건너가 맛난 밥과 정갈한 술을 나누었다. 그리고는 그가 존재론 속에서 말한 것처럼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어야’하는 세상을 향해 고무신을 신고 뚜벅뚜벅 걸어서 갔다.
댓글을 남겨주세요
※ 로그인 후 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