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연극을 한 편 봤어요. 파주에 이사온 뒤로 집도 회사도 파주라서 대학로에 갈 일이 없었는데. 연극 덕분에 대학로 구경도 했어요ㅎㅎ 참 많이 변했더라구요. 뭐, 서울은 눈만 깜박 하는 사이에도 건물이 뚝딱뚝딱 새로 생기는 도시라서 그리 놀랍지는 않았지만, 새로 생긴 가게들, 건물들이 있던 자리에 원래 있던 게 무엇이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제가 즐겨 다니던 단골집들이 아직 남아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하지만 그 가게들도 언젠간은 없어지고, 사람들에게 잊혀지겠지요. 사라질 때 사라지더라도 그 분들이 쫓겨나지만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본 연극은 '여기, 사람이 있다' 예요. 일년 한 번 볼까말까 하는 제가 감히 연극을 평할 수 있는 능력은 없구요, 그냥 좋은 연극 소개라고 여겨주세요. 단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념하기시를 바랍니다.
2029년, 용산 참사가 일어난 곳에 새로 생긴 스카이팰리스 로열층 404동 2501호. 미국에서 아메리칸 인디언 멸망사를 연구하는 강성현이라는 사람이 20년 만에 아들과 귀국합니다. 그런데 일주일만에 12살 난 아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의식불명이 돼요. 경찰에서는 강성현 씨와 다리를 저는 스카이팰리스 경비원, 미국에서 소식을 듣고 귀국한 강성현의 아내를 조사하지만 사건을 점점 미궁으로 빠져듭니다. 유일한 단서는 거실에 있는 인디언 조각상의 주인공과 어떤 아저씨가 잠든 자신을 쳐다본다는 소원이의 악몽뿐. 그리고 속속들이 드러나는 등장인물들의 20년 전 2009년 1월 행적...
이렇게 쓰고 보니까 무슨 심각하고 무시무시한 스릴러 같죠? 사실 끝까지 긴장이 풀리지 않고 집중할만큼 짜임새 있고 재미있긴 해요. 자기 땅에서 쫓겨나고 학살당한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망루에서 학살당한 철거민들을 연결시킨 게 이 연극 연출의 핵심인 거 같아요. 철거민들이 외쳤던 말들이 인디언들의 입에서 다시 나옵니다. "우리는 그냥 살고 싶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 것을 탐내지 않았다. 내 가족과 내 부족과 함께 살고 싶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등장인물들이 현재(2029년) 겪는 갈등과 갈등의 해결고리를 품고 있는 과거(2009년)를 눈여겨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다 말해버리면 연극 볼 때 재미없을까봐 자세히는 말하지 않을래요.
암튼 연극 문외한이라고 할 정도로 연극에 취미 없는 제가 이렇게 재미있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봤다면, 용산참사라는 좀 무거운 소재를 다루지만 무게에 짖눌리지 않고 보통 관객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연출이 잘 된 거겠죠?ㅋㅋ
꼭 보시라고 추천합니다.
그리고 용산참사를 기억해달라고 부탁드릴께요.
>>> 연극 '여기, 사람이 있다'는 5월 19일(목)부터 6월 5일(일)까지 대학로 연우무대 소극장에서 공연합니다. 티켓부스에서 <내가 살던 용산>를 팔고 있어요. 이미 읽어보신 분들은 반갑게 맞아주시고,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이번 기회에 책을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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