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
나는 공산주의자다> 교정을 보고있어요. 요새 허영철 선생님께서 많이 편찮으세요. 또 박건웅 작가는 결혼을 앞두고 있답니다. 그래서 ‘빨리 책을 만들어야겠다!’ 다짐을 하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하는데, 제 성격이 일이 바쁘더라도 스스로를 바쁘게 몰아가고 다그치는 걸 워낙 싫어해서요. 몸이 바쁜 건 괜찮은데, 마음이 바빠지면 일이 오히려 안되더라구요. 암튼 한참 교정을 보다가 또 글 한편 써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두 번째는 박건웅 작가를 소개하는 글이었는데, 이건 다음 기회에...)
갑자기 글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교정을 보다가 만난 한 문장 때문이에요. 이미 여러 차례 원고를 봤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문장이 아니지만, 볼 때 마다 이렇게 잠깐씩은 가슴이 먹먹해져 저 하늘 먼 곳을 바라보게 됩니다.
평생을 사회주의 혁명에 바쳐온 늙은 혁명가가, 자신이 믿는 가치에 대한 확신으로 묵묵히 역사의 한 가운데를 걸어왔던 혁명가가, 감옥 안에서 수학 문제 하나 풀고 부모님께 자랑하고 싶어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는 이야기가 저는 가슴에 와닿아요.
부러질지언정 흔들리지는 않을 것 같은 곧은 사람에게서 아이 같은 모습을 보아서 일까요? 아니면 누군가에게는 무시무시한 빨갱이로 불리고, 감옥 안에서 온갖 수난과 모욕을 견뎠던 이 사람도 이런 약한 모습(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을 갖고 있다는 것이 반가워서일까요?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강한 모습에 압도당하면 그를 존경하게 되지만, 약한 모습에 공감하면 그를 사랑하게 되는 거 같아요. 어렵게만 느껴지던 허영철 선생님을 사랑(?)하게 된 구절은 또 있습니다.
이 글은 남파되어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고향에 있는 친척에게 쓴 편지입니다. 악랄한 전향 공작에도 빙긋이 웃기만 하며, 교도소 측에게 "망상에 걸려 있는 광신 분자", "공산주의 사상을 맹신하여 전향을 계속적으로 거부"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늙은 혁명가가 늘그막에 친지에게 쓴 편지에서 고향에 대한 애절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어요. 사실 허영철 선생님은 젊어서부터 객지에서 노동일을 했고, 그 이후에는 혁명과 통일을 위해 애쓰시다가 감옥에 갇혀 36년을 보냈기 때문에 고향이라고 해봤자 어렸을 적 기억밖에 없을 거예요. 그런데도 고향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퍽 인상 깊게 느껴졌습니다. 잠깐 제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이 구절에서 많이 부러웠습니다. 기억에 남아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이. 저는 서울, 부산, 광주와 같은 대도시들에서만 살았고 자주 이사를 다녀서 고향은커녕 동네친구도 없었거든요. 나중에 돌아갈 곳이 없다는 불안감, 뿌리내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불안감. 자질구레한 설명 따위 필요 없이 나를 품어 안아줄 수 있는 '고향'이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없었던 구절입니다. <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허영철 선생님이 걸어온 길을 다루는 책이라서 수감되었던 시절 이야기는 다른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의 책에 비해서 비중이 크지 않아요. 하지만 허영철 선생님의 저 짧은 한마디 대사가, '비전향 장기수'가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물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홍구 선생님이 추천사에서 쓰신 것처럼 "민주 인사들조차 붙잡혀갔다 풀려날 때면 '그까짓 종이 한 장'하며 반성문이나 각서에 이름 석 자를 쓰곤 했'던 대한민국에서 '양심의 자유'는 헌법 속에 숨어있는 사치품이었으니까요. 최근에 <
경계도시2>라는 다큐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송두율 교수에게 내면의 굴종을 요구하는 한국사회(보수와 진보 모두)를 보면서, 간첩인지 아닌지 궁금해 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었는데, 송두율 교수 사건의 핵심도 저는 레드컴플렉스-철저한 이분법으로 나와 다른 이의 양심의 굴복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국 사상이나 이념의 문제 이전에 스스로 존엄한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는 '양심'의 문제라는 거지요. 아무리 사상이 투철하고 신념이 변치 않는다고 해도, 모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온갖 고문들을 견뎌 낸 건, 과연 이런 무자비한 고문을 행하는 인간이 고귀한 존재인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그 험악한 체제에 맞서, 인간이란 이래서 고귀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지켜내려는 마지막 오기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간'일 수 있는 건,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에 맞서서 끝내 '양심'을 지켜낸 분들 덕분인 거 같아요.
사실 책 원고를 보면서, 허영철 선생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구요. 하지만 이 분의 삶을 제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구구절절 예를 든 모습들 때문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웃음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빨리 책을 만들어서 여러분도 허영철 선생님을 만날 수 있게 하고 싶네요.^^
역사는 나를 한 번도 비껴 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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