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출판사 블로그

짐승의 시간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짐승의 시간-김근태, 남영동 22일간의 기록

박건웅

 

빠앙빠앙.”

1호선 용산역과 서울역 사이에 남영역이 있습니다. 큰 역들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역, 관리가 잘 안되어 있어 낡은 느낌을 주는 역사 안…….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열차를 잘못 타서 그곳에 잠시 내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퇴근길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매점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노랫소리가 울려 대던 풍경이 떠오릅니다.

의자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데 문득 눈앞에 시커먼 건물이 보였습니다. 왠지 단단해 보이는 참 멋진 건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쇠창살이 있는 걸로 보아 혹시 감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시절 나에게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몰랐습니다. 그곳이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는 것을, 그곳에서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끔찍한 고문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20년 뒤에 경찰청 인권센터로 변한 그곳을 처음으로 찾아가 보게 되었습니다.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게 만들었지만 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관리인 아저씨의 퉁명스러운 안내를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1987년 대학생이었던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숨졌던 곳을 빼고 모든 곳이 다시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19858, 김근태 선생님이 고문을 받았던 방을 둘러보고 있는데 열차 소리가 들렸습니다. 밖을 보니 당시 열차를 기다리는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독재 정권 아래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이곳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돼지를 잡아 보지 않은 사람들은 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직접 잡거나 잡는 모습을 본 사람은 고기를 제대로 먹을 수 없을 테지요. 마찬가지로 남영동에서 벌어진 끔찍한 고문 현장을 사람들이 생생하게 보았을 때 과연 어떤 생각들을 가지게 될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렇게 안과 밖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짐승의 시간-김근태, 남영동 22일간의 기록은 고문을 다룬 만화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고문이라는 주제가 다소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겠지만, 고문실에서 부당한 독재 권력에 맞서 싸우는 한 인간의 몸부림을 보면서 그 시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자 하였습니다.

이 만화는 201112월에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김근태 선생님 수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돌아보기 싫은 끔찍한 고통의 시간들을 다시 기억을 더듬으며 써 내려갔던 선생님의 수기를 읽으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것은 동정의 눈물이 아닌 분노의 눈물이었습니다. 이 만화를 완성하기까지 하루하루 감옥에 살았던 기분이 듭니다.

어느 날 취재를 하는데 어느 분으로부터 그곳에서 고문을 당했다는 사람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고문 경찰들은 발가벗겨진 채 모진 물고문과 전기 고문을 당한 사람에게 전기봉을 들이대며 벽을 타고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고문당하는 사람은 벽을 타고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지만 결국 수십 번 미끄러지고 넘어지게 되는데, 그때 고문 경찰이 웃으며 말했답니다.

거봐! 네가 올라가려고 하는 세상은 결코 올라갈 수 없는 곳이야! 알아?”

그러면 그 말은 총알처럼 뇌 속을 파고들어 고문당하는 사람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고, 지옥 같은 그곳을 빠져나오더라도 깊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희망과 꿈을 꿀 수 없는 사람처럼 도시를 배회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문으로 고통 받고 죽어 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둘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문 경찰들은 특별하게 악해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딸의 대학 입학을 격려하고 걱정하는, 우리가 전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조작한 제도에는 인간에게 숨겨져 있던 지독한 잔인함도 끌어낼 수 있나 봅니다. 그리고 그 제도 안에서는 우리들 가운데 누구라도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우린 잘못한 게 없어. 나라가 시키는 대로 했고, 애국을 했을 뿐이라고…….”

 

2014, 다시 오늘을 바라봅니다.

정의로운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최근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 같은 간첩단 사건들이 다시 생겨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정권의 안위를 지키려는 거짓된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다시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 김근태 선생님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에 대해 재심을 열었고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무려 28년 만에 일입니다. 김근태 선생님 부인인 인재근 의원은 김근태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열사들이 이루어 온 민주주의의 가치가 갈수록 훼손되어 가는 것을 안타깝게 느끼며 재심을 신청했다고 밝혔습니다.

 

삐익삐익 철컹철컹.”

또다시 열차가 들어옵니다.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된 세상을 강요하는 지금, 고문보다 끔찍한 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 전체가 남영동 건물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글은 <개똥이네 집> 105호 마음으로 만든 책에 실린 글입니다.

   

 

박건웅 어릴 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으며,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숨겨진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 왔다. 지은 책으로는 《꽃》 《노근리 이야기》 《홍이 이야기》 《나는 공산주의자다》가 있으며, 지금은 부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눈에 보이게 하는 만화 작업에 푹 빠져 있다.    

션

2014-07-02

개똥이네 놀이터에서 재밌게 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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