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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공동체 아이들

1995년 앞으로 정년퇴임 하려면 15년은 넉넉히 남았을 대학교수 한 분이 이런 선언을 한다.

“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질이 재미가 없거든. 농촌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거든. 그래서 나는 변산으로 농사지으러 떠난다. 안뇽.” 아니 이럴 수가. 이런 날벼락이 있나.

제자들은 부랴부랴 송별회를 마련하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선생님 농사 잘 지으세요, 부디 일 많이 하세요, 삽과 낫을 선물로 드릴게요, 그러면서 다들 속으로는 막걸리 사줄 물주가 한 명 없어졌다며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변산공동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철학교수를 하던 윤구병이라는 사람이 공동체 깃발을 흔들면서. 그이는 혼자 내려간 게 아니었다. 틈만 나면 아는 사람들을 불러 ‘야! 변산에 농사일이 바쁘니까 와서 일손 도와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농사지어서 먹어야 하는 거야’라며 이 사람 저 사람 꼬드기기 시작했다. 일도 얼마나 무식하게 시키는지 기계는 아예 쓰지 않아 몽둥이로 콩타작을 할 정도였다. ‘지구에 있는 에너지 중에 가장 좋은 에너지가 뭔지 알아? 바로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야. 나 권상우 몸매 만들어야 하거든. 기계 쓸 생각 말고 몸뚱어리로 해 알았지.’ 그러면서 본인은 무거운 돌 드는 시범 몇 번 보이고 다른 일 한다며 슬쩍 자리를 피한다. 나머지는 젊은 사람들 몫이다. 그래서 내 몸이 좋아졌냐고? 물론 엄청나게 좋아졌다. 변산공동체에서 날로 늘어나는 것은 밥 먹는 양과 막걸리 마시는 양, 그리고 무식한 힘밖에 없다.

오죽하면 공동체에서 1년 이상 살면 다들 허리띠 구멍이 한두 개씩은 줄어들까. 실제로 캐나다에서 살다가 몸이 안 좋아 치료차 한국에 왔다 공동체를 소개받아 같이 살던 형이 있었는데 처음 왔을 때 100㎏이 넘던 몸무게가 20㎏ 넘게 빠졌다. 고된 농사일과 푸성귀 위주의 소박한 밥상 덕이었다.

식구들이 처음 공동체에 올 때는 얼굴이 희멀건 하다. 도시에서 햇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았으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던 얼굴이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 새까맣게 탄다. 우리 부부도 여름을 보내고 서울 누나 집에 갔다가 과일가게 아줌마한테 “어 우리말을 잘하시네요”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은 때도 있었다.

공동체 식구들은 다들 젊다. 20대에서 30대가 대부분이고 40대는 가뭄에 콩 나듯이 있다. 나도 20대에 공동체에 들어와서 벌써 40대가 되었다. 공동체를 찾아온 이유도 가지가지다. 농사짓고 싶어서 온 사람,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있어서 온 사람, 공동체만이 희망이라며 찾아온 사람. 손님으로 왔다 식구들에게 찍혀 집요하게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협박까지 당한다. 도시는 곧 망한다. 니가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어. 여기서 사는 게 좋을 거야. 순진하게 넘어오는 사람도 있다.

공동체 식구가 되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우선 사유재산이 없다. 오기 전에 모은 돈은 자기 것이지만, 공동체에서 농사지어 생긴 수익을 개인한테 나눠주지는 않는다. 자기 집도 없다.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방을 옮겨다닌다. 우리 부부도 이사를 일곱 번인가 다녔다. 그래서 도시에서 올 때는 간단한 짐만 가지고 오라 한다. 큰 옷장이나 냉장고, 세탁기 다 필요 없으니 가져오지 말라고 한다. 왜냐고? 이사 다니려면 힘드니까.

이곳 아이들(사진)은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폰이 없다. 아이들이 심심하지 않을까? 별로 심심해 보이지 않는다. 없으면 없는 대로 알아서들 잘 논다. 공동체가 시작된 지 올해로 16년째다. 올해는 봄이 없고 겨울에서 바로 여름으로 건너뛰었다. 농사도 걱정이고 사람 몸도 걱정이다. 다들 건강 잘 챙기시길.

김희정 변산공동체 대표

한겨레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변산공동체 이야기입니다.




보리

보리 2010-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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