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골목길을 걷다가 어느 집 담벼락에 붙은 쪽지를 하나 보았습니다.
흰 종이에 얌전하고 또박또박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애완동물의 배설물을 수거해 가시기 앙망합니다."
겸손과 교양이 뚝뚝 묻어나는 듯한 그 글ㅇ르 읽고 '풋' 하고 웃음이 터졌습니다.
제 집 앞길에 널려 있는 개똥을 보고도 꾹 참으면서
이렇게 유식한 말로 타이를 수 있는 그 마음가짐이 돋보이기도 하지만,
세상에! 이게 어느 입에서 나온 어느 나라 말이래요?
재미 삼아 글자를 세어 보았습니다.
스무 자나 되었습니다.
이 말을 쉬운 우리 말로 쓰면 "깨똥 치워 가세요"가 되겠지요.
아마 쓴 분도 그렇게 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쑥 치미는 화를 갈앉히고 이렇게 에둘러 쓰느라고 얼마나 애썼을까요?
어쩌면 이분 머릿속에 '개똥'은 상스러운 말이고
'애완동물의 배설물'은 고상한 말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박혀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치워 가세요'라는 말이 너무 거친 말이라고 여겨지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렇게 속마음을 감추고 외래어투성이 글로 제 뜻을 나타내려는 버릇은 좋은 버릇도 아니고,
이런 글을 교양 있는 글이라고 보기도 힘듭니다.
오늘도 그 집 앞에 개똥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개를 끌고 그 집 앞을 지나간 사람은 그 글을 읽고도 무슨 뜻인지 몰랐거나
개가 그 글을 읽고 무슨 개 같은 소리야 하고 심술을 부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언제부터 어린애들도, 못 배운 사람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 말이 상스럽게 들리고,
힘 있는 사람들이 힘센 나라에서 마구잡이로 끌어들인 외래어로 도배된 어려운 말을
꾸역꾸역 뱉어 내는 못된 말버릇에 '우아'와 '교양'의 딱지가 붙게 되었을까요?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그리고 학자나 정치가의 입에서도
보통 사람들은 알아듣기 힘든 '교양 있는' 외래어가 줄줄이 흘러나옵니다.
오죽하면 우리 나라에서 나온 국어사전은 외래어 사전이지 국어사전이라고 부르기 낯부끄럽다고 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새누리당 당직자 여러분, 애완동물의 배설물 유사한 언사를 중지하시기를 요망합니다."
유병언의 주검과 함께 세월호 사건도 묻어 버리고, 보고를 받지 못했으니 책임질 일이 없다는 흰소리로
윤일병의 참혹한 살해 사건마저도 등 돌리는 헌누리당 구쾌의원들에게,
꼭 이렇게 아무도 못 알아들어 비위를 건드리지 않을 '언어'를 '구사'해야 몸보신이 된다고 여기실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한떄 교양이 철철 흐르는 어려운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사람이고, 먹물 가운데 먹물이었습니다.
더러운 말버릇을 고치느라고 스무 해 가까이 죽을 똥을 싼 끝에,
제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오는지 한번 들어 보실래요?
"어이, 헌누리! 개소리 집어쳐!"(참 교양 없지요?)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은 교양의 탈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됩니다.
-윤구병, <개똥이네 집> 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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