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한테 고마움을 느낍니다.
우리 코를 드나들어 목숨을 살리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람이 고맙습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해)'이 아래로 내려올 때 왜 비와 구름과 바람을 데리고 왔는지 알 듯합니다.
농사꾼은 하늘만 쳐다보고 삽니다.
(아마 그래서 '농심은 천심'이라는 말도 생겼겠지요.)
그 가운데 가장 자주 보는 것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입니다.
이 구름이 애써 기르고 있는 남새와 낟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때맞추어 그 구름이 비를 내려 주시면 그 해는 풍년이 들어 살길이 열리고 그러지 않으면 굶어 죽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이 구름에는 발이 없습니다.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바람이 구름을 날라 옵니다. 밀어 옵니다.
비를 듬뿍 담은 먹장구름도 데려오고, 하늘 높이 깔리는 새털구름도 모아 옵니다.
그래서 바람길이 잘 열리면 살길도 열리고 바람길이 막히면 살길도 막힙니다.
사람한테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람이 없으면 땅 위에 움 돋고 뛰어다니는 것 어느 하나 살길이 없습니다.
바람은 목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으로, 다시 말해서 '목숨'으로 제 모습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꽃 속에 암술과 수술을 마련하여 가루받이를 해 열매를 맺는 온갖 풀과 나무를 살립니다.
지난해도 살렸고, 올해도 살리고, 다음다음 해도 살릴 겁니다.
언제부터인지 이 바람이 바뀌고 있습니다.
바람이 앓고 목 졸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람결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바람이 나르는 것은 단비의 씨가 되는 흙알갱이만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사람 손으로 하늘에 흩뿌리는 몸에 해롭고, 목숨까지 노리는 온갖 화학물질이 가득합니다.
때맞추어 불어오던 바람이 시도 때도 없이 불어 풀을 말리고 땅을 메마르게 합니다.
아닌 때에 먹장구름을 몰고 와서 이곳저곳에 물벼락을 내리기도 하고,
바닷물을 밀어 붙여 핵발전소를 휩쓸어 버리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수억, 수십억 년 동안 '목숨'을 이어 주던 바람이 이제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 숨쉬는 것들 목숨을 앗으려 듭니다.
샛바람도, 늦바람도, 하늬바람도, 맞바람도 제 길을 잃었습니다.
얼리던 물을 다시 녹여 큰물로 땅을 잠기게 하고, 해가 갈수록 뜨겁게 달아올라 숨길을 턱턱 막고 있습니다.
저만 잘 살겠다고 지난 200년 남짓 모든 생명의 근원인 땅을 속살까지 파헤치고 갈기갈기 찢어 놓은 사람 탓입니다. 우리 탓입니다.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 뛰겠다는 올림픽 경기식 산업 문명이 바람조차 병들게 했습니다.
바람에 낯을 들 수 없습니다.
바람의 아들딸로 자란 우리 아이들한테도 낯을 들 수 없습니다.
바람 고마운 줄 모르고 살아온 제 삶이 부끄럽습니다.
이제라도 바람 고마운 줄 아는 사람들이 우리 목숨에 해로운 산업 문명을 휘저어 버릴 새 바람을 일으키면 좋겠습니다.
<개똥이네집> 2012년 9월호.
편집 살림꾼 지리소 2012-08-24
古傳을 만들면서 苦戰을 면치 못하다가, 책 만드는 일에도 사는 일에도 고전하고 있는 困而知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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